2019.11.02 10:38

11월 첫 주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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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더욱 깊어져 온 천지가 짙은 계절색으로 물든 11월입니다.

하늘도, 산도, 들도 오색 창연한 빛으로 현란한 요즘, 벌써 외투를 챙겨야 할 만큼 공기도 차가워졌습니다. 11월은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8일)이 있고, 첫눈이 온다는 소설(22일)도 있어서 이를테면 겨울왕국을 향해 출발하는 열차와도 같습니다. 또 수능이 있고, 그 수능 일정에 맞춰진 우리 교회의 <4주간 특새>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춥고, 무겁고, 비장하고, 살짝 부담스러운 달이기도 하고, 공휴일이 없어서 그림 없는 책처럼 누군가는 좀 지루해 할 수도 있는 달입니다. 아, 참! <11.11>, 빼빼로데이가 있네요. 상술이 만든 억지스런 날이긴 해도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감사하자는 거니까 애교로 봐주시길...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11월이 결코 지루하거나 무미건조한 달이 아닙니다. 야구에서 마무리 투수의 역할이 중요하듯,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한 해의 성패를 좌우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8번 타자가 출루하면 희망이 커지듯 11월을 잘 요리하면 그야말로 한 해를 멋지게 마무리할 수 있고, 또 새해에 대한 기대와 희망도 그만큼 더 커질 수 있습니다. 패색 짙던 야구가 8회에 역전 흐름을 잡아 기적 같은 반전 드라마를 연출하듯 이 11월에는 올 한 해 판세를 뒤집을 수도 있는 한 방의 기회가 숨어 있기도 합니다.

그동안 번번이 실패했던 일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전해 볼 수 있는 달이자 목표 달성에 지지부진한 점들을 반성하며 남은 힘을 모두 집중하기에도 좋은 달이어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12월에 있을 주님과의 연말결산을 준비하는 우리로서는 어쩌면 이 11월이 가장 진지하고 결정적인 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며,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야말로 특히 이 11월에 잘 어울리는 말씀 같습니다.

parable of talents.jpg

Willem de Poorter's The Parable of The Talents or Minas (Narodni Galerie, Prague)
 

어떤 주인이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면서 세 사람의 종에게 각각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의 돈을 맡겼다가 훗날 여행에서 돌아와 냉혹할 만큼 엄정하게 시비를 가리고 결산했다는 얘긴데, 그동안 이 말씀이 적잖은 수난을 당해왔습니다. 우선 세 사람에 대한 분배가 균등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또 주인이 적게 받은 자의 그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많이 가진 자에게 준 것은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악을 조장하는 처사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주인이 그 세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차등 배분한 것도 거기에는 이미 인간 차별이 전제돼 있다는 비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비유가 인간 사회의 경제 질서나 분배원칙을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 나라의 비유>(마 25:1)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결산의 날을 앞둔 존재로서의 인간이 과연 어떤 자세와 태도로 살아야 옳은가 하는 문제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던 종의 삶을 신랄하게 고발하는데, 결국 주인은 그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5:30)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주님으로부터 각자의 고유한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으로 열심히 장사하여 많은 이익을 내고 있고, 또 어떤 이들은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둔 채로 아무런 고민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연말결산의 날, 그간의 내 삶의 진상이 폭로될 12월이 박두했습니다.

이쯤에서 각자 자신을 점검해 봅시다.

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11월은 그래서 우리에게는 은혜의 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