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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장미의 월요일>(Rosenmontag), 모래는 <제비꽃 화요일>(Veilichendienstag), 그리고 이어지는 수요일이 바로 올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chermittwoch)입니다. 


<장미의 월요일>이란 사순절 기간 동안 고기와의 이별이 아쉬워 벌이는 사육제(카니발)가 최절정에 이르는 날을 뜻합니다. 그래서 <장미의 월요일>에 벌이는 카니발 퍼레이드가 언제나 그 해 카니발 축제의 피날레가 됩니다. 


그리고 다음 날인 <제비꽃 화요일>에는 그동안 무질서와 광란에 빠졌던 축제를 마무리하며, 특히 축제에 동원했던 크고 작은 인형들을 불태우는데 이 퍼포먼스를 <누벨 화형식>(Nubbel Verbrennung)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카니발 기간 동안 저지른 죄와 방탕을 회개하는 의미로 인형을 대신 사르는 의식이어서 보통은 사제가 집례합니다. 그리고 맞이하는 수요일이 바로 A.D. 325년 니케아 회의 때부터 지켜 온 <재의 수요일>인데, 이 날이 바로 머리에 검불을 쓰고 재 위에 앉아 회개하는 날로 부활절 전 40일간의 고난기간인 사순절이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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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사사기에는 전설적인 거인 삼손의 얘기가 나옵니다. 블레셋의 창녀 들릴라의 거듭된 유혹에 넘어간 삼손이 결국 자신의 힘의 비밀인 머리털을 깎이고 두 눈마저 뽑힌 채 감옥에 갇혀 짐승처럼 연자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신 다곤의 신전에 모여 축제를 벌이다 삼손을 희롱하기 위해 끌어낸 자리에서 삼손이 엄숙한 최후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강하게 하사 원수를 갚게 하옵소서>(삿 16:28)하며 힘을 다해 자신이 묶인 신전 중앙의 기둥을 부러뜨려 거기 모인 3천 명의 적들과 장렬한 최후를 마칩니다. 


희랍신화에도 이와 비슷한 거인 프로메테우스 얘기가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신만이 독점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줌으로써 인간편에 섭니다. 그러나 그 일로 제우스의 진노를 사 코카서스 바위에 결박당한 채 계속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다 최후를 맞습니다. 그래도 프로메테우스는 삼손보다 낫습니다. 삼손은 그 최후가 복수인데 반해 프로메테우스는 끝까지 인간을 배려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를 배신한 것처럼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 역시 형을 배신하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므로 결국은 제우스와 인간 사이의 불화를 더욱 악화시켰을 뿐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최후는 또 다른 차원을 전합니다. 삼손이 기둥에 묶이고, 프로메테우스가 바위에 결박당했듯 주님도 그렇게 십자가 형틀에 달려 최후를 맞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절망과 고통 속에서 드린 마지막 기도는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였습니다. 주님의 그 마지막 절규는 복수나 배신이 아니라 오히려 원수까지도 용서하신 사랑의 철저화이자 이쪽과 저쪽의 불화 사이에서 자신을 화해의 제물로 바치고자 하신 중보의 탄원이었습니다. 의절한 아버지와 아들, 갈라선 아들과 며느리의 두 손을 함께 잡고 숨을 거둔 어느 어머니의 최후와도 같은 것이고, 원수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바쳐진 화해의 향불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우리 민족의 3.1운동도 일본에 대한 보복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못가진 자에게 넘겨주고자 한 프로메테우스적 거사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원수된 두 나라 사이에 자신들을 화해의 제물로 바치고자 한 충정이었을 뿐입니다. 


부디 보복이나 배신이 아닌 용서와 사랑의 화신들이 되십시오. 그게 바로 고난의 절기인 이 사순절에 우리가 묵상해야 할 진정한 십자가 정신이며, 주님의 그런 화해의 죽음이 마침내 부활사건을 가져왔음을 깊이 깨달을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