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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명색이 목화자면서도 늘 가슴에 품고 사는 노자(老子)의 경구 하나가 있습니다. 도덕경에 나오는 <공성이불거>(功成以不居)라는 말인데, <공을 세우되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저야 그간 이룬 공이 없어 그 속에 머물고 말고 할 주제도 못되지만 70년대 후반 함석헌 선생이 명동 가톨릭 여성회관에서 노장(老莊)을 읽어줄 때 들은 그 오자성어만큼은 지금까지도 제 삶의 좌우명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유교나 또 잘못 해석된 우리 기독교의 도그마에 비해 얼마나 더 시원하고 통쾌한지 모릅니다. 가끔 도덕경 앞에서면 제 모습이 더 작아지고 기독교 신자로서, 또 목회자로서의 제 몰골이 많이 옹졸하다는 느낌이 들어 부끄러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도 그런 말씀이 없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않은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요 4:36-38). 주님의 이 말씀은 지금 우리의 삶이 무엇 위에 서있고, 내가 내 삶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 이유가 뭣인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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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한글날 저녁 방송된 MBC PD수첩 <명성교회 8백억의 비밀>이 기록적인 시청률(7.6%)을 자랑하며 또 한 번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습니다. 

교회 세습은 결국 공로 싸움입니다. 

<내가 심은 것이니 반드시 내가 거둬야겠다>는 철저한 이기심과 장삿속이 전제된 작태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홀로 누리는 기쁨만이 있을 뿐 남과 함께 나누는 더불어의 기쁨은 없습니다. 모든 교인이 자신의 수확물이고 오늘의 성공, 오늘의 명예, 오늘의 지위와 부가 다 자신의 능력,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믿기 때문에 세습이야말로 당연한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스스로 쳐놓은 공로의 그물에 웅크리고 앉아 거기에 걸려드는 먹잇감으로 사는 사람을 <거미형의 인간>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평생 공을 들이고도 누가 마다하거나 때가 됐다 싶으면 아무런 미련도 없이 훌훌 떠나는 자유로운 영혼은 <나비형의 인간>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자기가 세운 공로에 연연하지 않고 거기에 머물지 않는 이가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에 더 오래도록 남습니다. 주님도 거두는 자의 보람보다 심는 자의 기쁨이 더 크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나 홀로의 기쁨이 아니라 더불어의 기쁨이어서 그렇습니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하는 행복, 내가 뿌리는 것을 남이 거두며 기뻐하는 것에 참여한다는 것은 실로 삶의 큰 환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단순히 심고 거두는 그 자체보다도 너를 만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지금의 내 삶도 실은 내가 심어서 거둔 게 아니라는 자각이며, 나 또한 받은 자로서의 감격과 기쁨 때문에 다시 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결코 거두는 것을 목표로 삼거나 권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도 거저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심는 일에서 이미 거두는 자의 기쁨을 함께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심은 것을 거두고 당신은 내가 심은 것을 거두고!> 

여기에 바로 보람과 기쁨에 찬 상생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내가 심은 것이니 나와 내 자식이 거두겠다는 것은 당연지사고, 문제는 너 심은 것까지도 내가 거두되 수백 배, 수천 배까지도 수확하겠다는 데서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와 교회 현장이 극도로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이제 목회자도 더럽게 늙지 않기 위해 <공성이불거>를 염불처럼 외며 살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