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06 10:44

쑥과 마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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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시 <광야>는 태고의 바람소리처럼 이렇게 시작합니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4351년 전 처음 한반도의 하늘이 열리던 날도 올 개천절처럼 그렇게 한없이 푸른빛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민족의 개국을 <하늘이 열린 사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고조선의 창건이 곧 <하늘의 뜻>이었음을 선포한 민족사적 자부심의 발로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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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고려의 승려였던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설화는 참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우리 민족의 정서와 정신세계, 세계관 등을 두루 함축하고 있어서 이 시대 우리들에게도 소중한 정신적, 문화적 자산이 됨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기 위해 충족시켜야 했던 세 가지 조건은 오직 쑥과 마늘만 먹을 것, 굴속에서 지낼 것,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을 것 등이었습니다. 

우선 짐승이 사람이 된다는 설정은 윤회적 세계관을 가진 불교사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고, 곰과 호랑이의 대결에서 곰이 이겨 웅녀가 되었다는 것은 고대 모계사회의 문화인류학적 흔적을 말해 주는 것인 동시에 곰을 섬기던 토템족이 호랑이를 섬기던 토템족을 이기고 고조선 창건의 주체세력이 되었음을 밝히는 신화적 진술일 것입니다. 

또한 곰이 굴속에서 오직 쑥과 마늘만 먹으며 백일을 지냈다는 것은 당시 고조선이 지향한 이념적 실체를 대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즉 다른 종족이나 부족들과 피 흘리며 싸우기보다는 우주의 정기가 응집된 자연의 진액을 빨며 살고자 했던 순수 평화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밤중 으슥한 곳에 숨어 남의 생명을 노리는 호랑이 같은 성정의 폭력적 인간은 경멸한다는 속뜻도 담겨 있습니다. 쑥과 마늘은 고대로부터 영험한 약초로 널리 알려져 온 식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뿌리인 고조선은 남과 싸워서 뭔가를 빼앗기보다 오직 자연의 내공만으로 살고자 했던 생명 공동체의 원조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캄캄한 굴속에 들어가 자신의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시간 없이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호랑이처럼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굴 밖으로 뛰쳐나갈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은 더 이상 고통의 연금술을 배울 수 없습니다. 부부도, 부모도, 연인도, 친구도 도와줄 수 없고 오롯이 나만이 홀로 고통 앞에 서서 동굴의 어둠을 온 몸으로 견뎌야 하는 인고의 시간, 그 처음 하늘이 열리고 환웅이 내려와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시작한 백두산 신단수가 지금은 북한에 있을 뿐 아니라 언제부턴가는 그 절반이 아예 중국 영토로 편입되어 남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조선과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던 우리 민족의 원적지가 사연도 모른 채 남의 손에 넘어가 다른 나라 땅이 됐다니 생각할수록 참으로 통탄할 노릇입니다. 

<단군>이란 본디 고대 북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하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던 제사장, 즉 <탕구르>에서 유래된 말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입니다. 따라서 <단군>의 진정한 사명은 민족 공동체가 겪는 아픔을 하늘의 힘을 빌어 풀어주고 백성들 앞에 정신적인 좌표를 제시하는 데 있었으며, 개천절 또한 바로 그런 제사장의 출현과 <하늘의 열림>을 기뻐하며 벌이는 감사의 축제였던  것입니다.


단촐한 옷차림에 아주 느린 기차를 타고 저 가을이 오는 길목을 향해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유장하게 흐르는 강이며 정겨운 이 땅의 가을 풍경을 가득 가슴에 담고 싶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쑥과 마늘만 있으면 백일 동안은 너끈히 살아남는 우리 민족의 산하를 그렇게 다시 한 번 굽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