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01 11:16

가을 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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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천둥 번개가 치고 요란스레 비가 퍼부었습니다. 

곳곳에서 물난리가 나고 온 세상이 비에 흠뻑 젖었습니다. 

빗소리가 끊긴 새벽,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를 듣습니다.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음입니다. 

몹시 힘들었던 폭염과 열대야 속에서도, 사나운 태풍과 집중호우 속에서도 이렇듯 계절이 다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지요. 여름이 제아무리 무자비하다 해도 우주의 괘도를 도는 계절의 순리 앞에서는 결국 그 기세를 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저 시도 때도 없이 날뛰는 건 오직 우리 인간들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 며칠 간은 선풍기를 끄고 잤습니다. 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벌써 홑이불이 너무 얇게 느껴져 좀 포근한 이불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이번 휴가는 당초 계획했던 제주도 길이 태풍에 막혀 퍼붓는 비, 몰아치는 거센 바람을 뚫고 저 강원도 설악산과 충청도 청풍호를 다녀왔습니다. 설악산 신흥사와 권금성 쪽의 숲에서는 이미 가을 느낌이 묻어 났고, 청풍호 주변의 숲들과 나무들에서도 저만치에서 오고 있는 가을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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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가을 채비는 산의 나무들에게도, 숲속의 풀벌레들에게도, 올 여름 모진 폭염을 견뎌낸 우리 사람들에게도 다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유람선을 타고 호수 위를 지나다 문득 동화작가 이수호님의 시 한 편이 생각났습니다. 


<... 수몰되어 물속에 갇힌 학교며 동네 위를 유람선을 타고 지나갔다 / 누구도 그 깊은 물속에 그런 마을이 있었다고 기억하지 않았다 / 세월의 흐름에 시대의 변화에 / 깊이 잠겨 있을 뿐이었다 / 두려웠다 / 우리도 그렇게 잠겨가고 있지나 않은지.>


우리야말로 지금 현실을 핑계로 본래 품었던 믿음의 생각들이 차츰 둔감해져가고 변질되어 감에도 아무런 감각도 고민도 없이 도리어 편안해하며 추해져가는 자신의 몰골을 전혀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지요? 요즘은 마음에 깊이 품고 남을 사랑하는 일이 아주 구식이 된 시대입니다. 온통 잠깐의 흥미로운 대상을 고르는 일이 세상을 주도하는 세태가 된 것입니다. 묘하게도 몸을 겹겹이 감싸던 시대는 상대에 대한 마음이 깊었지만 노출이 일상화된 요즘은 드러난 몸이 일차적 목표가 된 문화입니다. 그래서 심지 깊은 사람을 보기 어렵고 인간에 대한 그리움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 또한 만나기가 힘들어 갑니다. 부디 짙게 화장한 이 시대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기를 빕니다. 가을바람처럼 창문 너머 그대의 방을 가득 채우고 비워도 여전히 남아 있는 감사와 감격이 세월이 갈수록 더욱 그리워지길 기도합니다. 현실이 견고하게 짜놓은 성곽은 안전판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탈출하지 못하게 가두는 영혼의 감옥이 되지만 초월과 하나님에 대한 열망은 언제나 우리에게 상상 이상의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곤 합니다. 이번 가을에는 비 내린 다음 날 오후처럼, 바람 선선한 깊은 산 맑은 물처럼, 깨끗한 하늘 빛 영성이 성큼 우리 안으로 들어왔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