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상드로 뒤마의 소설 <몬테 크리스토 백작>에 나오는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의 유명한 말입니다. 지난 날 자기가 뱉은 말들과 행위가 부메랑이 되어 결국은 다시 자신을 찌르는 칼끝이 된다는 뜻입니다. 

1815년 프랑스 마르세이유 항구에 오랜 항해를 마친 범선 한 척이 들어섰습니다. 이제 겨우 스무 살 쯤 돼 보이는 일등 항해사 에드몽 당테스가 그 입항을 지휘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온갖 진기한 물건과 사연을 싣고 돌아온 그 배를 맞기 위해 항구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번 항해는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당테스는 선주의 인정을 받아 일약 선장으로 승진될 행운까지도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그의 승승장구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반역의 음모를 씌워 졸지에 악명 높은 감옥 샤도디프에 갇히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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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테스는 그곳에서 탈출을 꿈꾸며 은밀히 벽을 파고 있던 늙은 신부 파리아를 만나 결국 투옥 14년 만에 탈옥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파리아 신부가 일러준 섬 몬테 크리스토(그리스도의 산)에 들어가 막대한 보물을 찾아내 거부가 되고,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고향 마르세이유로 돌아옵니다.

사랑과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역사가 서로 얽히면서 통쾌한 복수극으로 전개될 법도 했던 이 소설은 놀라운 반전으로 그 끝을 맺습니다. 한 때 선장과 선주를 꿈꿨던 에드몽 당테스가 복수의 허망함과 사랑 앞에서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는 그 모든 원한과 아픔, 그리고 허탈감을 뒤로 하고 그 마르세이유를 떠납니다. 모든 것을 오직 힘과 칼로 해결하던 시대에 당테스는 깊은 원한의 사슬을 끊고 모두가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인간적 진실을 토로한 셈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변절한 제자가 나타나 스승에게 입을 맞추며 신호를 보내자 무장한 하수인들이 달려들어 마치 강도를 잡듯 주님을 결박했습니다. 제자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고, 베드로는 칼을 뽑아 주님을 포박하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내리쳤습니다. 

그것은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자의 실존적인 저항이자 무고한 스승을 지키려는 한 제자의 충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말씀이 뜻밖입니다. 

<그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쓰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주님은 억울하고 불법하게 체포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평소 자신의 소신과 상반되는 방법으로 자기 방위를 꾀하시지 않았고, 심지어는 거룩한 투쟁, 혹은 진리의 수호자처럼 빼든 제자의 칼마저도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정당방위의 논리를 떠나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주고,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까지 돌려대라는, 그리고 마침내는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죽는 순간까지도 철저하게 관철했음을 뜻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주님이 그 마지막 순간 자기를 수호하기 위해 칼을 썼다면, 베드로가 빼든 칼을 용인하셨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기독교는 벌써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거나 아니면 성서적 기독교의 정체성을 잃고 완전히 변질되었을 것이며, 또 역사는 그만큼 더 참혹한 피 흘림으로 점철되었을 것입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 이게 바로 칼의 비극이고 칼의 악순환입니다. 

한 번 칼을 뽑아 피를 묻힌 사람은 언제나 그 칼을 들고 있어야 합니다. 칼에 희생된 사람들의 칼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쉽게 칼을 뽑는 습성에 젖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와 정치권 대부분의 불안이 바로 이 피 묻은 칼을 다시 칼집에 꽂지 못하는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게 제가 요즘 보복의 악순환을 끊고 마르세이유를 떠난 에드몽 당테스의 뒷모습을 자주 떠올리는 진정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