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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사사기에는 전설적인 삼손의 얘기가 나옵니다. 

주전 12세기 경 지중해 연안을 장악했던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위협하자 한 부부가 아들을 낳아 그 아이를 <나실>로 성별합니다. <나실>이란 특별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을 뜻하는데 당시 삼손이 <나실>이 된 것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나실인으로서의 규례도, 또 소임에도 대단히 불성실하고 무책임했습니다. 


적국인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취하는가 하면 창녀의 집을 드나들기도 하고, 함부로 힘을 과시하여 사자를 찢어 죽이기도 하고, 무고한 양민을 해치고 그 재산을 약탈하는가 하면 하찮은 일에 격분하여 여우 3백 마리를 붙잡아 그 꼬리에 불을 달아 다 익은 남의 곡식밭에 몰아넣는 등 갖은 난폭한 짓을 다 저질렀습니다. 결국 그는 블레셋의 창녀 들릴라의 거듭된 유혹에 넘어가 힘의 비밀인 머리털을 깎이고 두 눈마저 뽑힌 채 감옥에 갇혀 짐승처럼 연자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어느 날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신 다곤의 신전에 모여 축제를 벌이다 삼손을 희롱하기 위해 끌어냅니다. 그 사이 머리가 많이 자란 삼손이 마침내 비장한 최후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뽑은 저 블레셋 사람들에게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하옵소서>(삿 16:28). 그리고는 힘을 다해 자신이 묶인 신전의 중앙 기둥을 부러뜨려 거기 모인 3천 명 이상의 적들과 함께 장렬하게 산화합니다. 


희랍신화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가 있습니다. 거인 프로메테우스가 신들만이 독점한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줍니다. 그러나 그 일로 신들의 왕인 제우스의 진노를 사 코카서스 바위에 동철로 결박당한 채 독수리에게 계속 간을 뜯깁니다. 드디어 프로메테우스가 동생인 에피메테우스에게 최후의 부탁을 합니다. 자기가 굳게 잠궈 둔 비밀상자 하나만은 절대 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에피메테우스는 제우스가 보낸 여인 판도라의 꾐에 빠져 결국 그 상자를 엽니다. 순간 그 <판도라의 상자> 안에서 온갖 질병과 증오, 고통, 재앙 등 인간을 파멸시킬 갖은 악한 것들이 다 쏟아져 나왔습니다. 깜짝 놀란 에피메테우스가 황급히 상자 뚜껑을 다시 닫으려 하자 상자 안에서 <나도 내보내주시오!>하는 가냘픈 목소리가 새어나왔습니다. 그래서 <너는 무엇이냐?>하고 묻자 <나는 희망이오!>라고 대답합니다. 이 세상에 온갖 병마와 악이 범람하여 인간들이 절망할 때 <희망>을 내보내 그들을 구출하고자 했던 프로메테우스의 최후 선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프로메테우스는 확실히 삼손보다 한 차원 높습니다. 삼손은 최후가 복수인데 반해 프로메테우스는 끝까지 인간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를 배신한 것처럼 그의 동생도 프로메테우스를 배신했고, 그것이 결국 제우스와 인간 사이의 불화를 더욱 악화시켰을 뿐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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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복음서가 전하는 주님의 최후는 우리에게 또 다른 사실을 말씀합니다. 삼손이 다곤 신전의 기둥에 묶이고, 프로메테우스가 코카서스 바위에 결박당했듯 주님도 그렇게 십자가 형틀에 못 박혀 최후를 맞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절망과 고통 속에서 드린 마지막 기도는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였습니다. 이것은 복수나 배신이 아니라 오히려 원수까지도 용서하신 사랑의 철저화이자 이쪽과 저쪽의 불화 사이에서 자신을 화해의 제물로 바치고자 한 중보의 탄원이요 절규였습니다. 의절한 아버지와 아들, 돌아선 아들과 며느리의 두 손을 함께 잡고 숨을 거둔 어느 어머니의 최후와도 같은 것이고, 원수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바치신 화해의 향불 같은 것이었습니다. 


부디 삼손이나 프로메테우스의 후예가 아닌 주님의 제자들이 되십시오. 보복이나 배신이 아닌 용서와 화해와 사랑의 화신들이 되십시오. 그게 진정한 십자가 정신이자 고난의 계절인 이 사순절의 주제일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