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03 11:02

칼을 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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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독스>란 언뜻 보기에는 앞뒤가 안 맞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은 탁월한 진실이 담긴 역설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파라독스 어법을 가장 자유롭게 구사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성경은 그야말로 역설의 집대성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논법은 항상 현실의 가치와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부조리를 합리화하기보다 신랄하게 부정하고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폭력이 무저항에 굴복하는 역전과 반전이 바로 성경의 파라독스가 노리는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이 참 충격적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선교를 위해 제자들은 세상으로 내보내시며 하신 말씀인데 너무 과격해서 섬뜩할 지경입니다. 도대체 <예수와 칼>은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제자들이 무슨 이슬람 과격단체 같은 테러리스트도 아닌데 가슴에 칼을 하나씩 품고 가라는 말씀 아닙니까? 더구나 산상보훈에서는 <평화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하셨고,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며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하신 분 아니십니까?  비로소 속셈을 드러낸 듯한 주님의 이 역설을 우리가 감히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옳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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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칼 앞에 서면 우리는 항상 선택을 강요받고, 거기에 응하지 않으면 찔림을 당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 앞에 <날선 칼>로 서 계시며 그렇게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그분의 음성은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하지만 실은 내 목에 들이댄 서슬퍼런 칼날에 다름 아님을 깨달을 일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은 우리의 타락한 심령을 찌르는 칼이자 마비된 양심 속에 안주하는 우리의 영혼을 아연 긴장하게 하는 번뜩이는 보검입니다. 누구든 그 주님의 칼에 찔림을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아직 껍데기 신앙에 불과합니다. 나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허위와 위선의 외피는 반드시 주님의 그 날카로운 신검의 광채에 다 해체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칼은 오만한 자의 혀를 내리치며 사랑이 식은 가슴에서 그 차가운 심장을 도려내며, 이 어두운 시대의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에게서 늘 평화만 볼 뿐, 칼의 존재는 항용 잊고 삽니다.


칼이 없는 선교, 칼이 없는 신앙, 칼이 없는 교회, 칼이 없는 신자의 삶은 결코 아무것도 새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칼 없이는 굳어버린 이 시대의 양심과 냉혹한 현실을 찔러 생명을 구해내는 대수술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주님 칼에 찔림 없이는 옛 껍질을 깨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주님 칼에 찔리고 베여야 비로소 새 살이 돋아나고, 거기에 다시 생명의 온기가 흐르며 사랑의 맥박이 고동칩니다. 


부디 살기가 아닌 생기로 번뜩이는 주님의 칼이 3.1절 99돌을 맞은 이 분단시대에 통일을 이루고 우리 민족의 운명을 구하는 진정한 메스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해 봅니다. 

<이제 칼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눅2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