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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와 그리스도교


I. 사건의 문화화로서의 복음


예수는 “들의 꽃이 어떻게 자라나는가 살펴 보라 ...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입지 못하였다”고 했다. 들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도 솔로몬의 인위적 영화에 비길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솔로몬, 그로 말하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화려하게 살다간 최고의 문화적 인간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의 영광을 한갖 내일 아궁이에 던져진 들풀의 아름다움 앞에서 여지없이 격하시킨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연이 문화보다 낫다는 예수의 자연주의를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예수의 인간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의 편모로도 보아 좋을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삶의 행태에 대해서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마 8:20)고 했다. 집도 가정도 아무런 소유도 없이 그저 무전의 방랑객처럼 살았다는 얘기다. 이 또한 인간문화에 대한 저항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그리스도교는 두 가지 구성요소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복음이요, 다른 하나는 이 복음을 표현해 내는 문화적인 형식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이같은 주객도식의 이분법적 논리로서는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다 규정할 수 없다.


복음이란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자기 고백의 핵에 관한 일컬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가 하나의 종교일 수 있는 까닭도 바로 이 복음을 소유하고 있고 이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는 데서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교회의 제도적 이념도 이 복음에 기초한 것이고, 현실 삶에서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구현도 바로 이 복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결국 복음은 그리스도교의 정체를 위한 내용이면서 그 준거의 틀이 된다. 그런데 복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그리스도교 자신이 주장하듯이 형이상학적 개념의 보편성이라는 차원에서 수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 사건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라는 데 그 특징과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내용은 역사적 사건을 지시한다. 그것은 특정한 때, 특정한 자리에서 야기된 한 사건과 관련된다. 즉 연대기적 구획과 특정한 문화의 범주 속에서 이룩된 것이다. 따라서 복음이란 사건의 문화화이지 이미 그 사건 자체는 아닌 것이다. 사건이 문화적 진술을 통해 복음화된 것이다.


그럼에도 복음과 문화를 별개의 실재로 객관화하고, 그 양자의 관계를 주객의 구도로 정립하려는 노력은 처음부터 이원적인 사유의 틀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접근은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절대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그 주장의 강도 만큼이나 오히려 상대화될 수 밖에 없다는 역리가 성립된다. 문화가 인간의 통시적, 공시적 삶의 총체라면 인간 삶의 한 표상인 종교도 그 문화의 내포이지 문화의 범주를 벗어난 어떤 실체일 수는 없다. 설령 복음을 비롯한 종교 일반이 신성이라든가 궁극성 등을 얘기한다고 해도 그러한 종교적 주장들이 탈문화적인 것일 수는 없다.

종교의 구체성은 그러한 것들의 경험이 문화적인 현실로 실현될 때 비로소 그 실재성을 승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초월적인 경험이라 할지라도 비초월적인 경험 표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종교의 모습이다.


그런 면에서 문화는 복음에 대해 어떤 특정한, 혹은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다. 복음 역시도 인류 문화가 지닌 다양한 종교 표상의 하나일 뿐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여 고백적 차원에서의 진리성이 어떻게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되든지 간에 문화, 역사적 현실에서는 그리스도교의 복음도 어쩔 수 없이 역사적 상대주의의 틀 속에서 파악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따라서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적 전승의 언어가 문화국지적 한계를 들어낼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여간 자명한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종교적 봉헌은 언제나 이러한 지적 정직성을 넘어선다. 바로 이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복음이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현실인 문화와 만나는 그 관계구조의 갈등 및 긴장의 문제와 부딪치게 된다.


복음은 그리스도교의 종교화에서 다시 종교의 넉넉한 문화화에 이르지 않으면 독선적 배타성 때문에 그 어떤 자기 주장도 마침내는 상대화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복음이 복음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포기하면서 문화 속에서의 다의적인 의미 체계로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행동의 격률을 주장할 때 비로소 복음은 문화와의 관계를 논급할 수 있는 자기 정체를 확립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 그리스도교는 아직도 복음과 문화를 논의할 수 있는 데까지 자기를 충분히 열어 놓고 있지 못한 것 같다. 그럼에도 복음과 문화라는 광범한 주제에 대해 그저 원론적인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는 화자(話者)나 청자(庁者) 모두의 성에 찰 것 같지 않다. 사실 문화의 복합성에 대한 인식이 논의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 용어가 개념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차원에서 조차도 그 복합성을 상실하지 않을 정도다.


따라서 본 발제자는 다소 개념의 기본 범주를 좁히더라도 좀 더 실질적인 문제들을 짚어 보기로 했다. 이를테면 한국문화의 실질적 주체와 존재방식 문제를 검토하고, 특히 그리스도교가 한국문화와 유기적 공존을 주체적으로 이룩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자각과 해석학적 관점에 이르러야 하는가를 검토하려고 한다.


그리스도교가 한국의 문화에 접목됨으로써 우리 역사에 미친 공과를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는 일은 근대화, 서구화, 종속화의 거센 소용돌이로부터 파생된 모순들이 분단구조의 고착화로 인해 극대화되고 있는 오늘의 한국 상황에서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위치를 인식하고 한국 사회가 지양해야 할 방향과 한국 그리스도교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이념들을 밝히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전제 조건이다.


II. 한국 그리스도교의 문화적 자성


오늘 우리는 민족문화의 전통이 여러가지 형태로 부정되는 현실과 또 제국주의적 문화 침투와 정치, 경제적 종속의 위협을 인식하면서 한국 그리스도교가 새로운 민족문화 창달을 위해 어떤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 것인가에 문제의 촛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교의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 그리스도교가 지금까지 한국 문화를 멸시하면서 다른 문화를 이식시키는 부정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는 반성에 더 이상 비겁할 수 없다.


우리는 한국 문화에 역기능적이어야 오히려 참다운 그리스도인이었고, 전통문화에 무지할수록 더욱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사실상 서구화에 가장 앞장 서온게 바로 그리스도교였다. 오늘 한국 그리스도교가 서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으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양인이다. 아니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한국인이다. 그리스도교가 서구인들의 손을 거쳐 전수됐다고 하여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서구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오늘 우리는 서구신학이 복음을 잘못 해석해 왔다는 비판을 가하면서 그들의 해석권으로부터 탈출하고 자유하여 우리의 물음을 가지고 성서에 묻고, 우리의 눈으로 성서를 보며 우리의 귀로 성서를 들어야 한다. 이것이 비로 민족신학 형성의 토대일 터이다.


복음이 실은 사건의 문화적 해석이며, 거기서 비롯한 종교적 전승의 자리가 곧 그리스도교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복음은 언제 어디서나 문화적 조명을 통해 새롭게 해명되어야 하고, 우리는 우리의 문화 속에서 우리다운 언어로 복음 이해에 도전해야 옳다.


그럼에도 한국 그리스도교는 우리의 민족문화와 단절되어 전개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민중의 기층문화를 왜곡, 말살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이런 현상은 바로 한국 그리스도교가 서구문화와 그리스도교를 분별하는 최소한의 상식적인 사고 조차도 갖지 못한 소치이며, 그리스도교 이외의 모든 것을 우상으로 보는 그 교조적 독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한국 그리스도교는 문화적 자성과 더불어 문화사적 과제를 뼈아프게 인식해야만 할 때다. 즉 한국의 문화일체를 민족 공동체에 봉사하는 유기적 문화로 승화시켜야 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도 자칫 그리스도교의 문화적 패권주의 혹은 제국주의적 발상이 아닌가 하는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가 한국 문화와의 유기적 공존을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즉 지배하는 방식이냐 아니면 봉사하는 방식이냐, 민중의 자세로서냐 다스리는 자의 자세로서냐가 문제이다. 어쨌든 한국 그리스도교는 이제 그 시대적 정황으로 미루어 복음과 한국 문화라는 두 이질적인 실체를 통전시키는 과제에 보다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아니될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인다.


III. 전통문화와 복음의 통전


한국 그리스도교으 신앙 양태는 천박하고, 말만 무성할 뿐 심오한 영성과 내면성을 결핍하고 있다. 전통적 정신문화가 간직하고 있던 신비주의적인 뿌리를 얼마든지 그리스도교적으로 계승, 발전시킬 수 있었음에도 오히려 그 뿌리를 제거한 것이다. 거기에다 명상과 영성적 체험을 강조한 동방교회의 전통은 거의 한국교회에 전달되지 못했고, 서방교회의 ‘믿음으로만’이라는 전통 조차도 종교적 자기 수련과 연결시키지 못함으로써 삶과는 분리되었으며 믿음에 대한 이해 마저도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교리를 믿는 형식으로 굳어져 버렸다. 실로 참 의미의 믿음은 궁극적 실재를 향해 무아(無我), 무의식의 상태에까지 나를 방기(放棄)하고 내맡기는 것이다. 기도도 오히려 선(禅)과 같은 자세가 최고의 형태일런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불교나 노장(老壮)사상에서도 참 믿음의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는다. 이름 붙일 수도, 대상화할 수도 없는 것에 대한, 아니 대상 자체도 의식하지 않는 깊이의 차원, 무(無), 무위(無為)의 영역, 믿음으로 구원얻고자 하는 그 믿음 마저도 부정하는 자기 부정의 극치, 이것이 차라리 예수의 믿음과 통하는 형식이 아닐까.


이처럼 객체화되고 대상화된 그리스도론적 믿음의 규정을 넘어설 수 있는 전통적 뿌리와 문화적 잠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그리스도교는 그것과 단절되어 표피적인 신앙양태를 형성해 온 것이다. 잘 알다시피 동양적 사고는 선을 말하지 않거나 혹 말한다 해도 절대타자 또는 절대 초월자로서의 신을 말하지는 않음으로써 신과 일간이 영원한 평행선을 긋는 이분법에 빠지지 않는다. 불교는 신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신론으로 규정해 버리면 잘못이다. 그 자리에 ‘불(仏)’이 있기 때문이다. 유교에서는 ‘천(天)’ 또는 ‘상제(上帝)’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서구의 신처럼 페르조나론으로 발전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서구적 신관에서 보면 유신론이 아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한국 그리스도교는 이른바 신앙이라는 것을 너무 그리스도론적인 의미로만 제한함으로써 성서의 신앙개념을 지나치게 협의화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서의 ‘피스티스(pistis)’는 결코 그리스도론적인 협의로만이 아니라 자기를 어떤 절대의 품에 내맡기는 신뢰(Vertrauen)와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가령 불교의 무의식 세계로까지 탈아(脱我)하려는 것은 자신을 아주 내맡기는 행위요, 노장의 무나 무위의 강조도 인간의 어떤 기능이나 기교에 의존하려는 온갖 자기방어 장치를 해체해 버리는 것으로 이는 보다 큰 믿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필자는 동양적 문화가 가르쳐주는 신앙 자세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주객도식이 없는 구조를 가장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무엇을 믿는다’나 ‘무엇에 내맡긴다’보다 그저 ‘믿는다’, ‘내맡긴다’가 더 옳다고 본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불교나 노장이 대상으로서의 신을 말하지 않으니까 무신론적이라는 판단은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피상적이다.


IV. 야위스트들의 문화비판


인류의 문화사를 보면 흥망성쇠의 연속이다. 고대 문명사에 있어서 바벨론 제국은 가장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나라였다. 따라서 주변의 많은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들어 마침내는 세계국가의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어느날 졸지에 붕괴되어 그 잔해만을 남기고 말았다. 


야위스트라는 한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세계사를 독특하게 해석한 집단으로서 현대적으로 이름 붙인다면 문명비평가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바로 바벨론 문화의 붕괴를 해석한다. 그들은 바벨론 제국이 국력과 그 고도한 문명의 과시로 웅대하게 세우던 바벨탑 건설중단 사건을 바벨론 문명의 몰락의 상징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왜 바벨탑 건설이 중단된 것일까. 야위스트들은 그 사실을 세계사적 지평에서 해석한다. 그들에 의하면 원래 인간이라는 종족은 이동하면서 살았다. 그것은 바로 유목민족의 생태를 말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동쪽 시날 평야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이 바로 문화건설의 시작이다. 그들은 거기에 문화도시를 건설하기로 한다. 자연석 대신에 벽돌, 흙 대신에 아스팔트(역청)로 성곽을 쌓아 올렸다. 이른바 자연과 유리되는 문화적 건설이다. 이게 바로 테크놀로지의 발단이다. 그들은 그 성을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이 쌓기로 했다. 대지에서 멀수록 그만큼 발달된 문명이라고 한다. 그들은 인간의 힘으로 자기들의 삶의 보장을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야위스트는 그들의 건설 목적을 두 가지로 규명한다. 하나는 그 “이름을 드러내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자주 선언이요 자기 능력의 과시이며, 인간만으로써 그 어떤 외부의 간섭도 배제할 수 있는 확고한 공동체를 형성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원초적인 문명의 정의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 거대한 바벨탑은 중단되고 말았다. 야위스트는 그 문명의 붕괴가 바로 언어의 혼란에서 왔다고 한다. 즉 백성들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간단한 언급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사회계급의 형성을 의미할 수도 있고,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단절을 뜻할 수도 있으며, 불신사회가 형성됐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언어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이해의 전달이다. 그러므로 언어의 단절은 곧 이해의 단절이며, 그것은 이미 인간관계의 분열을 뜻한다. 그러나 야위스트는 바벨론 문명의 쇠망을 초래한 언어분열을 사회과학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한 이가 있는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한다. “이후로는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언어를 단절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명의 성격을 꿰뚫어 본 통찰이다.


문명은 바벨탑을 하늘에 닿게 하려는 욕망처럼 언제나 그 한계를 모른다. 또 그것은 어느 정도의 단계에 오르면 그 자체의 자율성(Autonomie) 때문에 그것을 만든 인간마저도 소외시킨채 그 자체로서 계속 앞으로 나간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언어를 혼란케 함으로 바벨탑 건설을 중단시킨 것은 두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하나는 인간의 교만에 대한 심판이요, 다른 하나는 최종적 자멸을 사전에 막자는 은총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야위스트는 인간 역사의 비극을 하나님 없는 세계 건설, 즉 인간만의 세계 구현이라는 문명성에서 본 것이다. 그들은 아담의 자주성 선언에서 시작하여 가인, 거인(네피림) 등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는 인간사회 형성의 과정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그렸고, 마침내 바벨탑 얘기로써 그 낡은 세계의 최후적 심판으로서의 분열을 그렸는데 그러나 야위스트들이 이러한 원역사를 그린 것은 부정적인 것을 말하려기보다 오히려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의 출현, 새로운 문화의 창출을 위한 서곡으로 삼기 위해서 였다.


그것이 바로 그 다음에 출현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바벨탑 건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바벨탑은 정착, 건설, 인간의 자주 그리고 수호, 말하자면 소유와 보존으로 성격화된 데 반해 아브라함은 보호와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데서 시작한다. 그것은 과거로부터의 탈출이며, 따라서 아무런 삶의 보장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내맡기는 삶이었다. 오직 그에게는 미래밖에 없었다. 바로 여기에서 고대의 문명 비평가들은 낡은 문화세계의 종말과 더불어 아브라함에게서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과 새로운 인간상을 본다. 소유에 의해 삶으로써 바벨탑을 쌓는 인간이 아니라, 오직 내맡김의 미래 개방적인 삶에서 이루어질 새로운 문화를 내다 본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소유함으로써 산다는 물질문화적 삶의 반제인 동시에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는 동양적 구도의 자세인 것이다.


V. 닫는 말


오늘날 우리도 바벨탑을 눈 앞에 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서구문명의 결산이다. 마침내 우리는 극심한 언어적 혼란 속에 산다. 오늘을 지배하는 정치적 언어는 더 이상 누구도 믿지 않는다. 세대 사이의 언어의 단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 그리고 한 가정에서 조차도 언어의 단절은 만연된 현상이다.


하여간 이 날까지의 서구문명은 갈 대로 다 갔다. 분명 현대 문명은 이런 형식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가 동양의 정신문화에서 참 살 길을 모색하고 복음도 굳이 동양문화라는 개념성을 통해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