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01 22:28

기독교의 사회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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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사회선교



예수의 대사회적 관심


예수는 분명 사회문제 프로그램에 직접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사회악을 모른 것은 아니다. 그의 비유들을 보면 당시의 간교한 사회악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고, 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고발한 대목을 보면 가히 사회악의 뿌리까지도 통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의식적으로 사회문제에 간섭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속 문제를 들고 온 사람에게 “나는 저런 것을 위해 오지 않았다”(눅 12:13-14)고 거절한 데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도대체 예수가 로마제국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 어디에서도 로마제국을 염두에 둔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 식민지민으로서의 고뇌나 또 그것으로부터의 자기 민족의 해방 등을 반영한 언어 행위 따위가 전무한 실정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왜 로마제국을 묵살했을까. 그렇다고 그가 불의한 현실에 대해 방임주의나 순응주의를 노정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토록 세밀한 이가 어찌 당대의 기상도를 몰랐겠는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기뻐하는 목자의 심정이며, 잃은 돈 한 푼을 되얻어 기뻐하는 처녀의 심정, 억울한 일을 당하고 오밤 중에 재판장을 찾는 여인의 심정까지 헤아리던 이가 어찌 로마제국의 음흉한 수작을 몰랐겠는가. 그러나 그는 끝내 로마로 진격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한 번 바꾸어 생각해 보자. 만약 그가 로마제국에 대해 민감했다면 어찌됐을까. 모르긴해도 아마 당시의 젤롯당과 결탁했을지도 알 수 없고, 로마 당국의 녹을 먹던 세리와는 아예 상종도 않았을 것이며, 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폭동을 획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가능했을까.


따라서 우리는 예수에게서 사회참여의 교서를 찾으려면 곧 실망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그를 통해 엄연한 사회변혁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확실히 그의 영향은 유대 민족의 배타주의를 타파하고 일부다처주의를 일부일처주의로 이끌었으며, 당시의 소외자로서의 죄인과 의인 사이의 계급적인 담을 헐었고, 부녀자와 아이들을 물건으로부터 인간으로 환원시켰다. 그렇다면 이런 결과들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원시교회의 사회참여


원시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회 문제에 대한 이렇다 할 관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특히 우리는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전 7:20, 24)는 바울의 권고나 골로새서, 에베소서, 베드로전서의 윤리 항목들, 즉 종은 주인에게 절대복종, 아내와 자녀들은 가장에게 절대복종이라는 등의 낡은 질서의 강조를 보면서도 예수에게서 느꼈던 것과 꼭 같은 실망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실제상의 원시교회의 궤적이다. 그들은 분명 유대민족의 배타주의의 사슬을 끊고 세계로 진출했으며 유대의 의식 종교를 과감히 타파함과 동시에 그들과 대결 또는 조화, 흡수라는 발랄한 신축성을 보이며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창출해 냈다. 그렇다면 이것은 대체 어디서 온 결과들인가.


오직 그들의 종말론적 신앙과 사랑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높은 차원에 삶의 근거를 두는 데 따를 필연적인 결과로 그들은 낡은 종교, 낡은 사회 질서로부터 탈피해 갔다. 이는 오고있는 하나님 나라에 그들의 삶의 거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떤 기존적인 것에 대해서도 자유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고 있는 미지의 세계에 자기를 내맡기고 현실과 마주 선다는 것은 곧 종말론적인 신앙행위를 뜻한다.


예수도 그랬다. 그는 말이나 교회 혹은 계급 투쟁의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행위로써 실제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삶으로써 사회 계급의 과행을 타파했다. 이처럼 참된 종교는 언제나 역사 앞에 사회 앞에 산 미래를 제시해야 한다. 그럴 때 자기도 살고 사회도 살린다.


하나님의 뜻, 상황, 결단


불트만(R. Bultmann)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하나님의 뜻(Gotteswille), 상황(Situation), 그리고 결단(Entscheidung)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성립된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뜻이란 처음부터 고정된 어떤 율법 같은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사회 속의 인간에게 그 상황을 통해 전달된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구체적인 삶의 자리(사회)에서 행위를 결단하므로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안다. 본래 희랍어에서 온 정치(Politik)이라는 말의 개염에는 공동체의 질서 보존 또는 그 방향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뜻과 더불어 분명한 목적을 향한 계획적인 행위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동체라는 전제다. 사람을 개별적으로만 보지 않고 한 사회의 일원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운명은 이 사회 향방이나 체질과 깊은 관계가 있다. 개인의 바른 길을 위해서는 그 사회의 방향이나 구조가 바로 잡혀야 한다. 구조적으로 부정한 사회에서 나 홀로 깨끗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전체 공기가 탁한데 어찌 나 홀로 맑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궁극적 구원은 이 세계, 이 역사, 이 사회의 구원 즉 전체의 구원과 여지없이 결부되어 있다.


악이라는 개념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결코 추상화될 수 없다. 악한 자, 악한 힘, 악한 조직, 악한 사상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의 구체성은 각 사람, 각 단체, 민족, 시대마다 다를 수 있다. 단순한 병일 수도 있고, 어떤 개인일 수도 있고, 어떤 관점, 어떤 정치적사회적인 조직일 수 있다. 어쨌든 그것은 나로 하여금 병들게 하고, 나를 속박하고 나에게 그럴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의지이다. 이것을 성서는 사탄이라고 하고, ‘이 세계’, ‘이 세대’라고도 한다. 요즘 랄로 하면 내 삶의 컨텍스트(Kontext)이다.


기독교의 시회선교의 타당성


구약의 예언자들을 보자. 그들은 우선 인간을 막연히 여기에 놓인 정적 본질로 파악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역사적 존재로 보았다. 즉 상황 속에서 보았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개개인의 윤리적 죄를 책망하기 이전에 부패한 권력자 그리고 지배층의 악정을 규탄했다. 이는 바로 죄의 사회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도 이 세대를 악마가 지배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악마의 추방을 동시저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공생애 중 마귀를 쫓는 일이 중요한 활동으로 보도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심지어 제자들을 파견할 때도 그러한 능력을 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탄이라고 표현된 낡은 세계의 지배력은 오늘날에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현실화되고 사회화된 구조악일 것이다. 하여간 우리가 오늘 기독교의 구원을 말할 때 그것은 결코 사탄적인 힘의 분쇄를 위한 투쟁과 유리될 수 없다. 해방과 구원은 “먼저 힘 센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막 3:27)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사회선교의 당위성이 자리한다. 오늘의 총체적인 삶의 구원없이 사후의 구원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구원이란 사후의 문제이기 이전에 지금 여기에 사는 나의 현실문제이다. 주기도문도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간구한다. 이것은 구원이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에로의 도피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 역사, 이 사회 내가 선 자리에서 이루어질 우주적 현실임을 말하는 것이다. 구약성서도 차안과 피안의 구분을 모른다. 이스라엘 민족, 역사가 곧 구원의 장이며 따라서 종교적 구원, 정치적 구원이 따로 없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사회선교에 지나치게 무심해 왔다. 이제라도 폐쇄적인 선교의 지평을 사회로 확장해 나가는 인식의 대전환이 있어야겠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타자를 위한 교회’이다. 세상에로 보냄받은 무리들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웃을 위해 기동적일 때 그 본래성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