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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함’의 의미와 신학적 당위

in: 신학논단, 58-64

신학도의 자리규정

신학도는 참 예사로운 존재이다. 생활에 쫓기고 쓰러지다 풀이 꺾이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맹목에 지배되고, 삶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머뭇거리는 가장 하찮은 자들 중의 하나이다. 다만 그 숱한 삶의 고뇌를 좀 더 응시하고, 그럼으로써 그 시대의 어둠을 명명하도록 불려졌다는 점이 다르다면 좀 다르다고나 할까. 그나마도 그의 언어의 대부분은 자신의 말이 아니다. 신학하는 자가 만일 화를 입는다면 거의가 이 말 때문인데, 그만치 말은 그의 행동이며 사건이며 모든 것이다. 그 말은 앞뒤를 돌아보지 않는 말이며, 눈치를 보지 않는 말이며, 겁이 없는 말이다. 따라서 신학도는 가장 순수하게 구속당한 자이다. 가장 깊게 살려는 자신의 삶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속한 것이며, 그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말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말이 아니라 모두에게 속한 말이다. 그의 말이 겁이 없는 것은 그의 말이, 그의 삶이 모두의 말이며, 모두의 삶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말이 겁을 먹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그가 이 순수한 구속을 저버린 탓이다. 모두의 삶으로 될 수 없는 개인의 삶을 살려 할 때, 모두의 말이 아닌 개인의 말을 하려 할 때, 그의 말은 겁을 먹는다. 신학도란 그 개인으로 볼 때는 천재도 영웅도 성인도 아닌 가장 어리석고 가장 겁많은 존재이다. 신학하는 자의 말이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은 그의 말이 자신의 말이면서 동시에 모두의 말일 수 있을 때이다. 신학하는 자의 고난이 의미있는 것은 그 삶이 자신의 삶이면서 모두의 삶일 때이다. 한 시대의 어두움을 명명하도록 부름받아 그 순수한 구속을 기꺼이 받아들 일 때 비로소 그는 참된 신학도일 수 있다.

신학적 언어로서의 ‘행동언어’

과소비적인 상업문화와 마비된 의식이 강물처럼 도도히 범람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뜻 바른 역사의 의미를 찾아내고 이 땅의 진실을 추구하는 신학의 길은 과연 무엇일까? 오늘날 우리 신학계에 엄습해오는 낭만적 치기는 삶의 진실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역동성보다는 오히려 터무니없는 좌절감과 절망감을 불러 일으켜 우리 시대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바른 혜안을 마비시키고 있다. 신학이 단지 현상적 사실을 이해하거나 시대적 징후를 파악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게 아니라는 것 쯤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최소한의 상식이다. 낭만적 감상만으로는 그것의 올바른 지평을 향해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다. 새삼스런 말이지만, 우리의 신학적 자양분은 끝끝내 성서와 우리의 현실적 삶일 수 밖에 없다. 삶의 현실이 제반요소의 구조적 적층 속에서 힘의 역학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따라서 우리의 당면과제는 삶에 대한 보다 명밀하고도 치열한 집착일 것이다. 그런 뜻에서 신학은 조작적인 절대적 가공미의 탐구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현실의 정확한 표명을 통해 획득되는 뜨거운감동을 짛ㅇ한다. 이는 우리의 신학적 노작이 예수가 추구했던 그 따뜻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세계를 이루는 하나의 초석이 되기를 희구하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신학도 틀림없는 하나의 학(學)이기 때문에 우선은 지식이나 학문의 영역에서 신학의 기초적인 개념이나 명제의 의미를 밝히고 기존의 체계화된 신학이론을 이해하며 그 이론이 안고 있는 문제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를 탐구하는 일 따위, 혹은 신학의 기본적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성서를 보다 세밀히 연구한다든지, 또 이를 위해 히브리어나 희랍어와 같은 성서의 원어들을 철저하게 익힌다든지, 그리고 신학의 주변학문들, 이를테면 철학이나 사회학이나 종교학 등을 공부한다든지 하는 과제에 최대한 성실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학문들과는 달리 신학에는 순수한 이론의 차원에만 머물 수 없다는 특수성이 있다. 우리는 흔히 신학의 이러한 실천성 혹은 행동성을 말하게 되면, 그것을 당장 이론 혹은 사변과 대비되거나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 이른바 이분법적 사고의 틀로 나눠보려는 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깊이 따져보면, 이론과 실천, 사고와 행동은 매양 한 실체의 양면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실체를 편의상 이론쪽과 실천쪽으로 나누어 이해해 보려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론과 실천, 사고와 행동은 하나이어야 한다는 당위 따위를 전제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이러한 당위란 특히 도덕의 영역에서는 필연적인 요청이지만 사람의 삶에 있어서는 이미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theoria’와 ‘praxis’ 이는 한 실재의 두 얼굴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그대로 신학적 입장을 대변한다. 신학이야말로 이론과 실천의 일치가 도모되는 곳이고, 실현되어야 할 장소이다. 또 그러한 차원을 비로소 우리는 ‘신학함(Theologiesieren)’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나 헤겔도 이성주의적, 관념론적 입장에 섰으면서도 실은 철학의 실천적 의미를 중시했다. 비록 세계를 개혁하려는 철학적 실천성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철학 자체의 도덕적, 정치적 의미를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정신은 오히려 신학쪽에서 제대로 실현되어야 한다. 아니 신학이야말로 이론의 실천성과 행동성이 지니는 그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발휘해야 하는 필연의 자리이다. 모든 정신과학(Geistwissenschaft)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테오리아와 프락시스의 일치성은 신학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있다. 이는 신학적 이론이라는 것이 본래 인간구원이라는 실천성을 합리화하기 위한 근거라는 데서 더욱 그렇다. 인간의 구원이 전인적인 이상, 신학은 단순히 신학적 이론의 탐구에 그치는 머리의 작업이기에 앞서 그 실천성을 온몸으로 살아야하는 삶에서 마침내 그 목표가 성취된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신학은 ‘신학하는 것’이어야 한다. 냉철한 머리로서만이 아니라 손과 발과 뜨거운 가슴으로, 온 몸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신학하는 것’이란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한 온 몸의 증언이라할 수 있다. 그것은 공허한 소리의 언어나 단순한 문자의 언어가 아닌 ‘행동의 언어’(Tatwort)를 뜻한다. 행동언어라는 말은 본디 헬레니즘의 전통에서는 찾을 수 없는 헤브라이즘의 전통, 즉 구약성서의 전통을 가진 것으로 여기에는 언어가 곧 행동이며 사건이라는 뜻 외에도 언어란 반드시 하나의 구체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언어야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창세기에 따르면 야훼께서는 맨 처음 말씀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까, 실제로 빛이 생겨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야훼의 창조적 언어가 다름아닌 ‘행동언어’의 실체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신학함의 의미는 자못 명백해진 셈이다. 그것은 이론과 실천이 기껏해야 개인의 삶 속에서 하나가 되는 실존적 차원 뿐 아니라, 역사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도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온 몸으로 신학을 산다는 뜻이다.

신학과 삶에 대한 새로운 지평

필자의 견해로는 현금 한국 신학계의 첨예한 양극화 현상을 우려하면서 이의 간극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하겠다는 벼르는 것이 소위 중도를 표방하는 ‘장신신학’의 입지인 듯하다. 어느 경우라도 현실에 대한 비판, 극복이라는 것은 역사 발전상의 당연한 귀결이자 엄연한 책무라 할진대, 극단한 양립의 와중에서의 이러한 몸짓은 불가불 변증법적 통전 내지는 화해를 내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양극화의 도식이 실상이냐 허상이냐에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의 판도를 편리하게 이분화하고 섣불리 화해나 중도를 운운하게 될 때 자칫 그것이 동참의 시각보다는 방관의 사각지대가 될 수 있다는 게 우선 필자의 허튼 기우이다. 시대적 소망의 삶을 살고자, 혹은 견디고자 하는 자에게는 괴롭게도 그 미완성의 동시대가 분화된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지나온 8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신학의 ‘이것’꽈 ‘저것’ 사이가 의가 좋았다고는 볼 수 없다. 휘청대는 민족사적 틀 속에 자리잡고자 스스로 몸부림치던 격동의 시대였으므로 그 역사적 당위에 대해 때로는 감동적인 선정성으로, 혹은 뿌리 굳건한 민중적 서정성으로, 참된 미래를 지향하는 상상력으로, 통일 지향적, 대하적 역사의식의 발현으로, 그리고 인간해방과 자유를 염원하는 전투적 집단성과 개인의지의 표출로 크고도 작은 물줄기와 다양한 방향감각을 보태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고적 교리지상주의와 매판적 서구 미학으로, 감상적 구호주의로, 현실도피적 순수주의의 관계성으로 그 흐름의 방향을 굴절, 후퇴시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뚜렷이 떠오른 것은 역시 우리 신학에의 아픈 자의식이다. 변증법이 어줍사리 ‘정반합’의 왈츠춤이 아니듯이, 다양성 또한 편리한 이분법적 도식을 먹고 자라나 시대의 부정을 방관, 조장하고 그 갈길을 막는 ‘정체적 부정의식’을 뜻하는 말일 수 없다면, 그것은 흐름의 여러 갈래를 뜻하는 말이며, 피와 살과 눈물과 목숨과 뼈와 사랑이 한 몸을 이루는 총체성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필자는 감히 신학이 우리 시대의 정신문화를 선도하는 전위대로서의 역할까지도 수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신학도들이 떠맡아야 할 숙명적인 과제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삶과 세계로부터 부여되는 온갖 억압과 옥죄는 사슬을 끊고 보다 너그럽고 넉넉한 화해의 세계에로의 지향, 이는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이며, 또 어떻게 보면 인류의 가장 오랜 집단 무의식인 종말론적 유토피아에의 의지에 닿아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의식공간 안에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환상적 이상이 아니라, 현실세계 안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이루어져야할 전 인류의 가장 열렬한 바램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신학은 삶의 이분법적 도식이 아닌 절실성의 기본 매체로서, 우리들 동시대적 삶의 어려움과 근원적인 기쁨과 희망과 화해의 의지를 표현하고 남에게 전달하며 함께 연대를 이루려는 일차적 노력으로서, 더불어 사는 미래 개방적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다짐과 확인과 결의의 메카니즘으로서 성서를 통해 그 대답을 모색하는 일에 최대한 성실해야 한다.

신학적 탐색 사이의 길트기

앞으로의 우리의 신학적 노작은 오늘의 젊은 신학세대가 펼쳐보이기 시작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한자리에 모아 그 전모를 가늠해 보고 또한 그 연대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요구에 의해 엮어져야 할 것이다. 실로 현 단계의 우리 신학은 젊음의 역동적 생성력을 몹시 필요로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제 우리 신학도들은 자칫 시대의 겉 분위기를 타고 굳어버리려는 모든 것에 대해 창조적인 부정과 갱신의 생기를 불어 넣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지를 다듬는 따위의 잔일이 아니라, 기존의 신앙관과 가치관의 체계를 그 뿌리로부터 변혁하는 보다 근본적인 탐색과 실천으로 이행되어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진정한 주체로서의 우리 신학을 이루어 나가는데 기여해야 할 이 당위성은, 크게 보아 한 시대적 역할을 담당해 온 지난 세대의 모든 노력을 단숨에 무산시키려는 음협한 위협에 맞서 이를 극복해 내야 하는 동시에, 이제는 단순히 부정적인 요소와의 싸움만으로는 안되며 보다 긍정적인 새로운 자리를 마련해 나가야 한다는 이중의 과제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시대를 넘어서며 배운 바, 이 이중의 어려움은 별개의 실마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 둘이되 실은 하나로 감당되고 성취되어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 신학의 참다운 현실인식과 극복에의 노력은 하나님 나라의 풍요로운 비젼과 능력의 활성화를 동시에 한몸으로 껴안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이러한 노력의 일단을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신학들이 개인적인 작업이나 써클, 학회 등의 소집단적 활동을 통해 여러 형태로 개진되기 시작하였음은 퍽 고무적인 일이다. 제 각각의 확고한 신념과 그에 상응하는 우리 신학의 적극적인 모색이 앞으로도 더욱 다양화되고 활발해져야겠지만, 그에 대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통된 기반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상이한 것들로, 때로는 부분적인 것만으로 얼핏 받아들여지는 여러 움직임들간의 열린 관계의 확립이며, 가능성의 확대, 심화일 것이다. 이것은 지난 세대가 겪은 모순으로서의 뜻없는 분열을 지양하고 진정한 나뉨과 묶임의 자장(磁場)을 형성해 보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나뉨은 묶임을 통해 지양, 승화되고, 묵임은 나뉨을 통해 확산, 고양되기 때문이다. 좌절이나 아픔을 애매한 한풀이나 민중주의로 전가시키는 것은 다만 헛된 자의식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패배적 순응주의 뿐만 아니라, 관념적인 급진주의도 거부해야 할 것이며, 적당한 휴머니즘이나 단선적인 구호도 배격해야 할 것이다. 문화란 당대 민중의 삶과 세계에 대한 반응양상의 총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항상 동시대의 역사, 사회적 제 여건에 의해 조건지워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러한 역사, 사회적 제 여건은 때로 어떠한 계기를 맞게 되면 억압과 핍박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난 우리의 역사 속에서 무수히 겪어온 삶의 굴절, 그러한 왜곡된 삶의 현실을 바로 뚫고, 분화된 삶을 생명의 기본적 질서에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 자유의 곧은 실현일 것이며, 역사의 정직한 지향일 것이고, 모든 신학도의 종말론적 삶의 형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