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15 09:52

악법과 저항

조회 수 1428
악법과 저항
마태 21:12-17; 23-27

in: 1992. NCC 공동설교문

거룩한 성전이 시장화된 것을 목격한 예수는 홀홀 단신으로 나서서 장사하는 무리들의 집기들을 둘러엎고 비둘기와 양들을 몰아내면서 “너희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소리소리 지르며 의분을 터트렸다. 본문 15절 이하를 보면 예수의 그런 행위에 대해 일반 민중들과 젊은이들은 만세를 부르며 찬사를 보냈으나, 소위 성전 주인임을 자처하던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은 도리어 분개하며 이를 갈았다. 그들에게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도대체 예수라는 작자에게 성전을 정화할 수 있는 어떤 권리가 있느냐 하는 게 문제였다. 따라서 “당신은 대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오?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위를 당신에게 주었단 말이오?” 하며 대든 것이다. 사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당시 예수의 그 행위는 분명 난동에 가까운 것이었다. 난동이란 기존 질서가 주는 권한 이외의 일을 폭력적으로 저지르는 행위를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인된 성전 관리인들이 엄연히 따로 있는데 아무런 자격도 없는 한 시골 청년이 그같은 폭력을 휘두르며 부린 난동이 정말 정당한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결코 그럴 것 같지 않다. 그러기에 예수 역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제 그는 범법자요, 사회질서 교란자로서 처벌받아 마땅한 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예수에게 권위를 따진 그 성전 주인이라는 자들의 항의도 한 번쯤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말한 [권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유대인들에게서의 권위적 존재란 일반적으로 제사장,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을 꼽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에게 “대체 무슨 권위로 이같은 짓을 하느냐?”고 추궁한 것은 너는 모세나 아론의 후예인 제사장도 아니고, 공인된 서기관도 아니며, 또 백성들 가운데서 추대된 원로도 아닌데 어찌 감히 이런 황당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느냐는 엄중한 문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를 보면 그는 언제나 그런 권위를 거부하는 이로 그려지고 있다. 권위를 내세우기는커녕 도리어 권위에 도전하여 싸운 분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그는 기득권자들이 묻는 권위의 근거를 제시하려기보다 오히려 즉각적인 반문으로써 정말 그들이 요구하는 권위만이 전부인가를 되새기게 한다. “나도 한 가지 물어 보겠다. 대답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느냐 사람에게서 왔느냐?” 예수의 이 날카로운 질문에 그들 역시 결국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것이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그런데 왜 그를 믿지 않느냐는 비판을 면치 못할 테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그를 예언자로 믿는 민중들의 분노를 살 것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모른다고 대답할 밖에 없었던 것인데, 이렇게 하여 그들의 입을 봉해버린 예수는 “그러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말하지 않겠다”며 그 언쟁을 끝내고 만다.

권위랄 현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다. 그것은 소위 민주주의와 더불어 각성된 의식이다. 이제 권위란 국가권력이나 사회 일반에서 뿐 아니라 종교 안에서도 용납되지 않는다. 하여간 일체의 권위를 타파해버리자는 것이 현대인들의 지상과제처럼 되어 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오늘의 권위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부모와 선생, 정치인들을 싸잡아 구세대라 하여 저항하기도 한다. 예루살렘 성전을 숙청한 예수도 확실히 권위주의를 정면에서 거부했다. 그런 면에서는 오늘의 젊은 세대와도 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권위 자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가 있는 것 같다. 권위를 묻는 유대인들에게 던진 예수의 반문은 요한의 세례에 관한 것으로서 그것이 사람의 권위로서냐 하나님의 권위로서냐 하는 것이었는데, 무엇 보다도 우리가 여기에서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권위와 하나님에게서 오는 권위가 뚜렷이 구별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세례요한의 권위는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었다. 까닭은 그 역시도 당시의 기존질서 속에서는 그렇게 세례를 베풀고, 사회악을 고발하며 회개를 촉구할 수 있었던 어떤 자리도 허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제사장도, 서기관도, 장로도 아니었다. 다만 이제 올 하나님의 나라의 빛 안에서 현재를 심판했을 뿐이다.
예수는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사실 그가 여기에서 말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말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확실히 예수는 그의 권위를 말할 수 없었다. 세례 요한의 그것처럼 그의 권위도 기존의 가치관에 의해서는 결코 입증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말할 수 있었다면 그 역시도 이미 낡은 질서에 속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한 나라에 혁명이 일어나도 혁명을 주도하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행위를 뒷받침하는 사상은 반드시 지금까지의 기존 질서 속에서는 아무런 귄위도 못가졌던 것이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비록 정권이 교체된다고 해도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권력을 찬탈하는 쿠데타 이상일 수 없다. 그 사실은 근대의 한국의 정치현실이 잘 말해 주고 있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는 바로 하나님 나라에 그 권위의 거점을 두었던 자들이다. 하나님 나라는 기존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적인 현실이다. 그러한 그들이 어떻게 현질서의 가치관이 승인하는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예수는 어떤 권위인지를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일관된 태도였다.
자, 이쯤에서 우리는 이제 중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세상이 정말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고, 악법이 인간 위에 군림하여 인권을 유린하고 있는 현실이라면 누가 과연 그것을 문책하고 그것들과 대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자란 우선 기존 질서에 아무런 자리도 갖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 기존 질서가 인정하는 권위로서는 불가능하다.
공자는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일에 간섭 말라”고 했다. 그런 뜻에서 “세상에 도가 있으면 나가 활동하고, 도가 없으면 숨어 버리라”고 한다. 그것이 이른바 군자의 처세이다. 즉 그것은 기존 질서를 대전제하고 그것의 범위 내에서만 행위 하라는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도는 저절로 생기는가를 묻고 싶다. 예수는 결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 세상 속에서는 그 어떤 지위도 없었기에 항거할 수 있었고 또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현실에 저항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실은 기존 사회 전체의 향방을 물었던 것이다.

사실 기존 질서란 구조적인 연쇄성을 가졌기 때문에 부분 부분을 따져보면 다 필연적인 것뿐이다. 가령 성전에서 예배하려면 양이나 비둘기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 이방에서 온 순례자들은 그런 제물을 가능한 한 성전 가까이에서 살 수 밖에 없고, 그럴려면 우선 외국돈을 유대돈으로 환전해야 한다. 따라서 성전 당국은 아예 성전 안에다 양과 비둘기 파는 가게를 마련하고 환전소도 설치해서 예배자들에게 편리를 제공하고 또 거기서 생기는 이윤으로 성전 유지비도 조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논리에서 보면 그 어느 것 하나도 다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개개인은 그러한 연쇄구조 속의 일익을 맡고 있기 때문에 전체를 운운할 눈도 권리도 가질 겨를이 없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는 성전이 시장판으로 둔갑하고, 독재와 착취, 온갖 부조리와 인권유린이 난무해도 아무런 반성도 없이 살아간다. 이젠 정말 방향도, 가치관도, 의미도 묻는 이가 없으며, 정의니 진리니 하는 것도 한갓 공허한 소리가 되고 말았다.
권위주의적 사회일수록 조직과 법이 강화되어 마침내 그것은 비인간화의 작업과 더불어 인권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오늘의 한국 역사도 분명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 그럼에도 현질서에 지위를 가진 자들에게는 개선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무명의 권외자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권위로!]라며 달려드는 공권력에 무참히 짓밟혀 모두 잡혀가고 말았다.
1992년 5월 31일 현재 구속된 전체 양심수는 780명에 이른다. 이들은 모두가 국가 보안법, 집시법, 노동쟁의 조정법, 군형법 등의 무자비한 악법에 저촉되어 수감된 자들이다. 빼앗긴 자가 있으면 빼앗는 자가 있다. 예수는 눌린 자, 가난한 자, 즉 인권을 빼앗긴 [죄인]들은 옹호한 반면, 기득권자들은 비판했고, 마침내는 그들의 손에 처형되었다. 이 사실은 예수에게는 종교나 윤리적인 죄보다 인권을 유린하는 기득권자들에 대한 분노가 더 컸음을 시사한다. 특히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마 2:27)는 예수의 발언은 인간을 억누르는 제도와 악법에 대한 부정임과 동시에 장엄한 인권선언이다. 인권을 유린하는 그 어떤 제도도 용인할 수 없다는 예수의 결연한 의지다. 그리고 이 원칙은 국가의 질서나 법, 윤리적 관행 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 어떤 법이나 제도도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있지 법을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가 그릇된 기존의 ‘권위’를 부정한 것은 결코 어떤 새로운 권위를 노려서가 아니다. 이는 그가 권위에 대해 진정으로 자유했기 때문일 것이며, 그것은 다시 지상에는 그 어떤 권위도 절대적일 수 없다는 신념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사심없는 혁명, 현질서의 참된 변혁은 바로 이런 예수의 정신을 따를 때만이 가능하리라.

그렇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작은 반도의 한 많은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자들은 권외에 있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는 교회가 이 기막힌 인권유린의 현실 앞에서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외치는 소리에 함께 참여하지 못하고 정교분리 운운하며 그것은 내 할 일이 아니라고 돌아선다면, 이 나라 이 사회는 망하는 도리 밖에는 없다. [무슨 권위로!] 라며 대드는 기득권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비장한 각오로써 악법개폐를 위한 투쟁에 나서자. 예수가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