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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


in: 농촌목회연구원 1월 자료, 182-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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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1884-1976)


서론


불트만은 마부르그의 자유주의 신학자 헤르만(리츨학파의 대표적인 신학자)의 제자이다. 불트만은 바르트에 이어서, 그리고 본회퍼의 영향력이 나타나기 전까지 유럽 신학계의 판도를 지배한 사람이었다. 바르트의 관심이 하나님의 전적인 타자성에 집중된 데 반해 불트만의 관심은 계시의 운반체인 성서에 집중된다. 그래서 그는 성서의 메시지를 어떻게 현대인들에게 전달하고 또 의미를 갖게 할 것인가? 하는 성서해석의 방법을 연구하는 데 온 정열을 다 바쳤다. 불트만은 성서 기자들이 당대 사람들에게 계시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했던 사고 패턴은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성서가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이해 가능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계시의 핵심적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처음 수용했던 고대인들의 사고 패턴을 분리하는 작업을 해야 하고 다음은 고대인들의 사고 구조에서 놓여난 그 계시의 메시지에다 다시 현대인들의 사고 패턴을 옷입힌 다음 이 시대 인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앙이 발생될 수 있는 만남이란 언제나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듣고 예! 하고 응답하는 인간 사이의 만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들음이라는 것은 신앙 이전에 우선 의미있는 접촉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불트만은 신과 인간의 진실된 만남을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현존재 분석을 시도한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인간은 무엇이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현대인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떤 상황 속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불트만은 이런 물음들에 답하기 위한 수단으로 실존철학, 특히 마틴 하이데거를 택한다. 불트만이 굳이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인 하이데거를 선택한 이유는 그의 실존철학이 인간의 현 존재성을 가장 정직하고 명확하게 분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향해 던지는 물음에 대해서도 가장 타당한 답변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이데거의 무신론적 입장이 자기가 참여하고 있는 변증법적 신학의 신이해에도 오히려 부합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신학에 의하면 신이란 인간에 의해서는 결단코 인식될 수 없고 오직 신의 자기 계시에 의해서만 인식이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불트만에게는 철학적 견지에서는 결코 신에 관해 말할 수 없고 신을 발견할 수도 없다는 하이데거의 무신론이 오히려 진실한 인간 고백으로 돌렸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현존재 해석학을 인간에 관한 가장 적절한 인식 수단으로 평가하여 그의 신학적 인간 이해의 틀 속에 적극 수용한다. 일단 하이데거의 도움으로 현존재 분석의 과제를 달성하고 난 불트만은 또 하나 중요한 문제인 하나님 말씀에로 주의를 옮긴다.


성서의 하나님은 제1세기 인간들이 살고 있던 문화적 틀 내에서 그리고 그들이 처해 있던 고유한 상황 내에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제1세기의 상황과 제1세기의 세계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달 수단인 성서와 하나님의 본래적 메시지를 분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바로 이 하나님 말씀의 내용과 그 말씀의 표현 수단의 분리과정을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라고 부른다. 이렇게 현존재 분석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비신화화 작업이 이룩된 후 비로소 불트만은 하나님의 말슴의 재해석이다. 따라서 불트만 신학의 구도는 세 가지 측면, 즉 현존재 분석과 비신화화, 그리고 말슴의 재해석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1. 현존재 분석


불트만이 절대 의존하고 있는 하이데거(1927년 “존재와 시간”에 나타난 현존재 분석을 의미함)에 의하면 현대인이 직면한 삶의 가장 기본적인 가능성은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이다.


본래적 실존이란 인간이 자신과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주체적으로 발전시키는 길을 선택하는 삶을 말한다. 그리고 비본래적 실존이란 인간이 자신을 이 세계(사물)와 집합적인 대중에게 내 맡겨 그것들에 의해 자신이 형성되고 영향 받게 하려는 삶을 가리킨다. 하이데거는 현대인의 대부분이 후자의 길, 곧 자신의 개별적 인격성의 책임을 포기하는 비본래적 삶을 사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이유는 그것이 훨씬 살기가 쉽기 때문이다. 비인격화된 대중의 일원이 되어 그런 삶의 방식에 만족하고 그런 가치관에 안주하여 사는 일이란 결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삶에 비해 자결의 길, 본래적 실존의 길을 선택하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본래적 실존이란 인간이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가능성들을 선택하는데 대한 완전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간은 누구도 이 두 유형의 실존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선택하지 않으려는 결종도 역시 비본래적인 실존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된다. 이리하여 결국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체적으로 형성해 나갈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에 의해 형성되어 가도록 내 던져 버릴 것인지에 대해 선택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번에 결판나는 선택은 아니다. 오히려 삶은 두 가지 실존 가운데서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모든 현재는 자유로운 결단의 순간이다. 그리고 이같은 지속적인 선택의 필요성이 삶의 중요한 성격인 불안을 조장한다. 불트만은 역사내의 존재로서의 인간의 주요 특징을 불안이라 생각하였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영원한 긴장 가운데서 실존한다. 매 순간마다 인간은 세계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개별적인 인격을 상실하거나 아니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미래의 자신을 던져 본래적 존재를 성취하거나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자신의 실존에 대해 느끼는 불안을 달래기 위해 비본래적인 실존을 선택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자신을 세계에 내어 줌으로써 보다 확실하게 사물의 지배 아래로 떨어질 뿐이다. 그리고 주체성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사물이 그의 주인이 된다. 따라서 인간은 참다운 자아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게 된다. 다른 한편 자신에게 열려져 있는 두 가지 선택의 길 가운데서 본래적 실존의 길을 선택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그는 어떻게 자신의 삶의 길을 실현해 가는가.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격우는 일단 인간이 본래적 실존의 길을 선택하고 나면 스스로 본래적 삶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고 보는 반면에 불트만은 변증법적 신학자답게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는 본래적인 실존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본다. 어쨌든 불트만은 본래적 실존의 성취는 오로지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면 본래적 실존을 위한 선택이란 말은 무엇을 의마하는가? 그것은 곧 자유를 위한 결단을 의미한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한데 첫째는, 이 세상으로부터 즉 사물에 대한 예속상태로부터 그리고 집합체의 비인격적 구조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제부터는 자신의 삶에 대한 완전한 책임을 스스로 지겠다는 결단이다. 둘재, 본래적 실존을 위한 선택은 결국 미래를 위한 결단이기 때문에 과거가 인간에게 가져다 준 온갖 예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결단을 의미한다. 그것은 과거의 실패와 죄책,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어 참다운 자아로부터 소외된 상태를 모두 내어버리는 선택이다. 그것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책임에 전념하겠다는 결단이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한 것도 바로 인간에게 열려있는 새 가능성에 대한 선언이후 동시에 그 가능성에 대한 자신을 개방할 때에만 비로소 참 인간으로서의 구원이 있음을 계시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인간에게 열린 새로운 가능성이다. 인간은 도래하는 것에 비해서만 참 자기로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불트만이 이해한 성서 특유의 인간관이다. 그래서 나를 얽어 매고 있는 낡은 사슬을 끊고 새 세계로의 탈출을 종용하는 말이 바로 예수의 회개하라는 외침이고 그것이 곧 본래적 실존을 위한 결단의 촉구라는 것이다.


2. 성서의 비신화화


현대인들의 성서이해에 대한 불트만이 가지는 주요 관심은 신약의 표상 세계와 현대인의 표상 세계의 깊은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된다. 불트만에 의하면 현대인들의 세계상은 자연과학과 기술에 의해 이해되는 합리적이고도 차안적인데 비해 성서는 모두가 신화적 세계상에 기초하고 있다. 성서는 이 세계를 삼중구조로 이해한다. 위는 하늘, 아래는 지옥, 중간은 신과 사탄의 싸움터로서의 이 세상이다. 불트만은 이렇게 말한다. “신약성서의 세계상은 신화적인 세계상이다. 심지어는 신약성서 선포의 본래적 내용을 이루는 구속 사건의 설명도 바로 이 신화적 세계상에 일치한다.” 그러니까 신약성서는 그 내용의 핵심적인 구속사건 조차도 신화론적 표상으로 진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상을 보자. 우선 그는 선재했던 신적인 존재이다. 그러다가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십자가에서 모든 죄의 대가를 위해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본래의 하늘로 되돌아 가셨다가 이제, 죽은 자의 부활과 심판을 통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 위해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게 된다. 불트만에 의하면 이러한 그리스도상은 신화론적 진술로서 영지주의적 구속신화와 유대교적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론 뿐만 아니라 종말론도 마찬가지이다. 즉 종말이 시간적인 우주적인 대 몰락의 드라마로 표상된다. 이를테면 천상의 세력과 악마세력 간의 최후의 투쟁이 일어나고 그 후에 우주적 종말의 심판자가 천사를 거느리고 나타나서 죽은 자들을 다 살려 내어 어떤 이들은 구원하고 어떤 이들은 저주로 심판한다는 것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미래의 이런 사건이 실재로 일어날 것이라고 소박하게 기대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것이다. 그는 성서의 신화론적 종말은 예수의 재림이 신약의 기대처럼 곧 도래하지 않았고 세계 역사는 계속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되어 갈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통해 이미 근본적으로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불트만은 예수의 부활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신화적 사건이라고 한다. 오늘 우리로서는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세계에 살았고 신화적 경험에 일치되게 예수를 해석했던 제자들의 부활절 신앙에 대해서만 알 뿐이라고 한다. 이러한 신화적 세계상은 역사적이며, 자연과학적인 세계상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황당한 얘기다.


불트만은 전기와 라디오를 이용하고 아플 때 현대의학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신약에 나타난 악마와 영들의 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며 그리스도교의 선포가 현대인들에게 신화적 세계상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의미도 없다고 했다. 성서의 신화적 세계상은 그 자체가 특별히 기독교적인 것일 수 없는 단순히 지나간 시대의 세계상일 뿐이다. 이렇게 현대인의 세계상과 자기 이해가 신약의 신화론적 표상세계와 마찰을 일으킨다면 신약의 증언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불트만에 의하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신약성서의 복음을 이상주의적 윤리(리츨, 하르낙)나 신비적으로 채색된 종교적 정서, 혹은 감정(쉴라이어마허)으로 환원시켰다. 그러나 신약은 인간의 종교성이나 윤리성에 대해 말하는 책이 아니라 ts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구속 사건에 관해 말한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결정적 구속사건인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의 종교적이고도 윤리적인 모범이나 선생으로만 이해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켰다고 불트만은 비난한다.


여기서 불트만은 복음이 현대인들에게 이해되게 하기 위해서는 현대적 사고 방식으로 신약의 신화론적 표상을 비판하고 비신화화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신화의 본래적 의도는 객관적인 세계상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그의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표현하고자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성서의 신화는 우주론적이 아닌 인간학적으로 실존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트만의 입장에 반하여, 칼 야스퍼스나 폴 틸리히 등은 초월에 관한 한 실제로 암호나 상징으로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고 보아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을 반대한다. 신화의 의미를 밝히는 실존론적 해석이 결국은 신화가 지니는 비이성적 깊이를 대상화함으로써 마침내 신화가 지니는 깊이의 차원을 파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도 성서의 신화적 표상을 직접적이고도 문자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은 거부했다는 점에서 불트만과 일치한다. 불트만에 있어서의 신약성서의 사신은 비신화화 되어야 한다. 현대인의 사유는 이미 신약성서를 지배하고 있는 신화적 사유란 의식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었고 더우기 믿을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곧 그들의 이성적 사유, 과학적 사유를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로서는 이 세계와 삶의 온갖 수수께끼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신화론적인 방법이 최선의 해석학적 도구였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코페르니쿠스적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 자연과학적인 사유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성서의 신화적 표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며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의 결과는 정신 분열증일 뿐이다. 그렇다면 비신화화의 가정은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 불트만에 따르면 신화의 제거를 통해서는 비신화화가 불가능하다. 만약 비신화화가 성서의 신화적 표상 일체를 거부하는 것이라면 결코 새로운 것일 수 없다. 신화 제거의 작업은 이미 19세기의 급진적인 성서학자들에 의해서도 상당한 수준까지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실패한 것은 신화를 해석하려 하지 않고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불트만은 자신이 쓰고 있는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란 용어 자체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칫 이 개념이 신화를 제거한다는 뜻으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불트만이 말하는 비신화화론의 과제는 신화의 제거가 아니라 신화의 실존론적 의미를 밝혀내는 해석학적 작업이다. 따라서 불트만의 비신화화론은 신약의 신화론적 진술을 비판한다는 부정적인 의도 보다는 오히려 그 진술들 속에 있는 실존이해를 해명한다는 긍정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신화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되고 설명되고 이해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불트만은 자신의 비신화화론을 성서에 대한 실존적 해석이라고 한다. 그러면 성서의 신화적 진술은 어떻게 재해석되어야 하는가?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 신화 속의 하나님의 메시지인 케리그마는 무엇인가?


3. 말씀의 재해석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성서를 향해 올바로 질문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성서가 대답하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불트만이 이해한 신약성서의 관심은 전적으로 인간 실존에 대한 문제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트만의 신학을 실존론적 신학이라고 규정한다.


1) 구속사건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

불트만에 있어서 구속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집중된다. 성서의 십자가와 부활기사에는 역사적인 것과 신화론적인 것이 뒤엉켜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를 역사로 보고 어디까지를 역사적인 것으로 수용할 것인가? 우선 불트만에 의하면 십자가는 분명 역사적 사건으로 용납되어야 한다. 비록 신화적으로 채색되기는 했어도 심지어는 십자가 사건의 날짜까지도 확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내포한 실존적 의미성을 밝히는데 있다. 즉 그것을 자신의 실존문제와 관계 지을 때만이 분명해 진다. 따라서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지나간 역사적 사건의 신화론적 표상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 세계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고 이 세계와 자신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에게 의존하기 위해 비본래적 실존에로 이끌 뿐인 자신에 대한 의존성을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 세계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죽는 것,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실존론적으로 체험한 사람은 이제 새로운 삶에로 들어선다.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비본래적인 실존에 대해서는 죽고 본래적 실존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실존적 의미이다. 따라서 불트만에게 있어서의 부활은 십자가와 실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은 한갓 신화인가? 일단은 그렇다. 예수의 부활은 신화적 사건이다. 그러나 더 정확한 표현은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은 전혀 그의 돤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부활을 취급하는 신약성서 역시도 부활의 역사적 성격 보다는 오히려 실존적 종말사건으로서의 의의에 관심을 집중한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성서를 통해 알고 있는 것도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성을 신화적으로 해석하는 제자들의 부활 신앙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독자적인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의 구속의미의 표현이다. 부활은 십자가가 구속사건으로 선포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서가 아니라 말씀(제자들의 케리그마) 속에서 부활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부활의 신앙이란 부활 케리그마에 대한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결코 형이상학적으로 사변할 수 있는 기적이 아니라 선포되는 말씀에 대한 이해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선포 속에서 부활했으며 그리스도인의 신앙 속에서 지금도 부활한다. 따라서 부활은 지나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 일어나는 실존론적 이해의 사건이다. 일찍이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는 오늘도 말씀의 선포 속에서 여전히 우리를 만나고 있다. 바로 이 케리그마에 현재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부활신앙의 의의이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이 주는 범인류적인 의미는 역사적인 한 인물이었던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서 입체적이고도 구체적인 구속의 메시지를 선포하셨다는 데 있다. 그 하나님의 케리그마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결단을 통해 비본래적 실존을 십자가에 못박고 다시 본래적 실존으로 부활하라는 것이다.


2) 종말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


불트만에 의하면 비본래적인 삶을 영위하던 사람이 본래적 삶으로 전향하려면 구속함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신약성서는 전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때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 즉 십자가 사건인데 어쨌든 인간은 반드시 구속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을 믿을 때 비로소 본래적 실존의 성취가 가능해 진다. 그런데 그 본래적 실존의 선택이란 곧 이 세계가 그에게 부과한 비본래성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에 실존적 종말을 뜻한다. 그는 이제 세상과 세상적인 삶으로부터의 결별을 통해 종말론적 실존이 된다. 그러므로 본래적 실존이란 곧 종말론적 실존을 말하며 종말론적 실존이란 비본래적 실존의 종국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개인의 신앙 안에서 이미 사건이 되는 실존적인 세상 종말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종말론을 부정하는 즉 시간적이고도 역사적인 종말을 거부하는 현대신학사 가운데 대표적인 한 사람이 된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불트만은 그의 독특한 실존론적 해석학을 통해 신약성서를 모조리 비신화화함으로써 성서 본래의 케리그마를 이 시대에도 여전히 타당한 보편적 진리로 회복시켰다고 확신한다.


결론


그럼 결론적으로 흔히 지적되는 불트만 신학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첫째는 불트만의 역사 감각에 대한 문제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종교,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기초한 일면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믿음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불트만은 예수에 대해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도 역사와 케리그마 사이 그리고 예수의 삶과 삶의 의미에 대한 교회의 설교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그 이상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트만에게 있어서의 역사는 언제나 신화 속에 숨겨져서 회복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불트만의 관심은 대부분 그리스도 사건이 지금 여기에서 개인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매어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말하면 역사적 예수 탐구의 노력은 부질 없는 것이고 무익한 것이다. 이러한 불트만의 역사적 회의주의가 그 동안 가장 심각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2000년 교회사는 교회가 복음서의 내용을 엄연한 역사적 사건들로 받아들여 왔음을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의 삶은 그리스도교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교회가 장구한 세월을 통해 믿어온 것을 그렇게 가볍게 제쳐놓을 수는 없다는게 불트만에 반대하는 교회의 입장이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첫째로 만약 그리스도교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지 못할 경우 결국 붕괴되고 말 것이라고 한다. 아무런 역사적 연관도 없는 신화론적 표상이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전 실존을 바쳐서 자기 삶을 결단할 수 있게 하는 생의 기반이 될 수 있는가? 둘째는 불트만은 성서를 오로지 실존적으로만 의미있게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내용이 인간의 실존적 물음에 대해서만 의도된 것인가 하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약성서는 미래에 있을 우주적 종말에 대해 다양하게 언급을 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세계의 종말과 그 종말에 수반될 여러 징조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복음서에도 최후적 심판의 표상이 많이 나온다. 따라서 성서적 종말론은 오히려 역사적이고도 우주적인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트만의 종말 이해는 지나치게 개인적이며 실존적이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종말이란 한 개인의 비본래적 실존으로부터의 전향, 즉 세계의존적인 삶의 종국을 의미한다. 따라서 불트만 신학의 비역사적 측면에 대한 비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집요하게 시도되어 왔다. 주목할만한 몇 차례의 시도를 살펴보면 우선 오스카 쿨만의 도전인데 그는 1946년에 출판된 “그리스도와 시간”이라는 저작에서 예수의 역사는 비신화화론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요소가 아니라, 초대 교회 선포의 중심을 결정하는 객관적 기초라고 밝히면서 불트만에 대해 강력한 반발을 보였다. 다음은 불트만 학파의 저명한 학자인 에른스트 케제만이 1952년 괴팅엔 대학에서 행한 “독일 신약학의 문제들”이라는 강연을 꼽을 수 있다. 케제만은 이 강연에서 부활절 이후에 신앙되고 전파된 그리스도는 이른바 역사적 예수와의 연속성 속에 있다. 그리고 이 원칙이 없이는 신앙과 선포도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며 불트만의 케리그마 신학에 반기를 들었다. 바로 케제만의 이 강연을 계기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후기 불트만 학파의 시대가 시작된다(케제만, 보른캄, 에른스트 푹스, 에벨링, 콘첼만, 막센, 로빈슨, 브라운 등). 그러나 이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한다. 그 다음이 소위 판넨베르그의 도전이다. 판넨베르그는 1959년에 “구속사건과 역사”라는 강연을 통해 역사를 신학의 중심 개념으로 부각시켰다.


“역사는 그리스도 신학의 포괄적인 지평이다. 모든 신학적 질문들과 대답들은 역사의 테두리 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불트만의 비역사적 신학을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판넨베르그도 불트만을 극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끝으로 1965년 “희망의 신학”으로 등단한 몰트만을 들 수 있다. 그는 희망의 신학을 통해 불트만의 비역사적인 실존론적 종말론을 구체적인 역사적 종말론, 미래적 종말론, 희망의 종말론을 활성화시킨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의 현대신학의 흐름은 역사와 희망의 신학으로 전환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트만의 영향력도 만만치 않다. 그것은 아직가지도 불트만의 이론 체계를 극복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