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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개신교 신학사상은 주로 세 가지 노선을 따라 전개되었다. 칼 바르트에 의해 시작된 첫 노선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난 신적 계시를 설명하는 데 집중하였다. 이 접근 법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과 순종으로 응답해야 할 필요성이 강조된다. 루돌프 불트만에 의해 나타난 두 번째 노선은 그 지향 면에서 본질적으로 성서적이었다. 성서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이루어진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성서는 그것이 인간의 실존적 물음들, 곧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으며, 되어야 하는가 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해석되어진다.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에게서 우리는 세 번째 발전노선, 곧 기독교 계시의 철학적 이해의 주된 대표자를 만나게 된다. 틸리히가 기독교에 대한 철학적 접근법을 택한 것은 바르트의 계시적 접근법과 정반대를 이룬다는 사실이 곧 주목될 것이다. 틸리히 자신이 이 기본적 차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신학이란 두 가지 방법으로 접근될 수 있다고 믿는다. 신학자가 기독교 케리그마를 특정 상황 속에 처한 인간에게 의미를 갖게 만드는 것을 중요시 하기 보다 기독교 케리그마의 불변성, 그 영원한 진리를 강조하는 길을 택할 때 그 신학자는 케리그마적 신학(a kerygmatic theology)을 낳게 된다. 케리그마적 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순수한 형태로 보존하는 데 주된 관심이 있다.


바르트는 바로 이와 같은 신학을 선택한 것으로 틸리히는 믿는다. 또한 틸리히는 이와 같은 신학(케리그마적 신학)은 기독교 진리를 동시대적 상황에 적응시키려하는 노력을 기울일 때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인 상대화의 위험으로부터 기독교 진리를 수호하는 장점이 있음을 시인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틸리히 자신은 “대답의 신학(an answering theology)”을 선택한다. 이 접근법에서는 학자는 먼저 인간이 묻고 있는 물음들에 귀를 기울이고 그 다음에 기독교 메시지를 인간의 물음들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정리한다.


틸리히는 첫 번째 신학의 위험성은 부적합성(irrelevance)에 있고, 두 번째 신학의 위험성은 왜곡과 희석와(dilution)를 가져오는 적응(adaptation)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종교는 그것이 인간에게 현존하게 되려면 현실문화에 대하여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그는 부적합성의 위험보다는 왜곡의 위험을 무릅쓰는 길을 택한다.


틸리히는 철학자를 겸한 신학자(a philosopher-theologian)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들을 검토하는 데는 철학이 그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물음들이 노출되고 이런 물음들 속에 내재한 인간적 상황이 밝혀져야 비로소 신학자는 기독교가 이런 물음들과 이 상황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상관의 방법


틸리히는 자신의 신학방법을 상관의 방법(the method of correlation)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상관의 방법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상관의 방법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실존적 물음들과 신학적 대답들을 상호연결(interdependence)시킴을 통하여 설명한다 … .” 신의 대답으로부터 출발하는 바르트와는 달리 틸리히의 출발점은 인간의 물음이다. 인간의 물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탐구는 그로 하여 인간 문화의 광범위한 영역을 탐구하게 만든다. 그 까닭은 그는 인간은 문화적 형식들 속에서 스스로를 가장 훌륭하게 드러낸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문화적 형식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 문화적 형식들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이해, 관심 및 불안들을 표현한다.


틸리히에게 있어서는 회화, 연극, 정치, 역사, 사회학, 과학, 심층 심리학, 문확, 철학, 삶의 패턴, 이 모든 것들이 인간 상황에 대한 그의 분석의 재료가 된다. 문화 탐구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는 인간이 묻는 물음들이 무엇인가를 알기에 이른다. 오직 이 단계에 이르게 된 때에야 비로소 그는 신학화하고, 인간의 물음들에 대답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일에 손을 댄다. 달리 표현하면, 틸리히는 그의 필생의 작업이 “한계상황”(boundarysituation), 곧 철학과 신학, 종교와 문화의 경계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다. 그의 과제는 이 양쪽을 이해하여 이 양자 간의 상관관계를, 한 걸음 더나아가서는 이 양자 상호간의 침투관계(mutualinterpenetration)를 이룩해 놓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신학자의 과제를 이렇게 이해하는 밑바탕에는 “문화의 실체가 종교이듯이 종교의 형식은 문화이다”고 하는 틸리히의 확신이 깔려 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어떤 문명의 문화적 형식들을 연구하는 것은 그 종교적 관심들, 또는 종교적 관심의 결여를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혹은 달리 표현하면, 종교가 어떤 문화 속에 존재하는 경우 종교는 그 문화의 모든 형식들 속에 그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종교가 문화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 문화는 어떠한 종교적 함축들도 결여하게 된다.


인간의 상황


상관의 방법에 충실하여 틸리히의 신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현상황에 대해 분석한다. 오늘날의 인간은 누구인가? 그는 과거의 인간에게서처럼 오늘날의 인간에게도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가장 기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생각하면서 기본적인 인간의 유한성의 조건을 의식하게 된다. 인간의 실존 소유는 제한된 소유이며, 이 제한된 소유조차도 계속 비실존(non-existence)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의 존재는 위태롭다. 그는 어떤 순간에라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순간 순간 비존재(non-being)에 직면하고 있음을 안다. 이같은 위협에 직면하여 인간은 어떻게 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그는 어딘가에서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를 발견하고, 삶은 그 위태로운 성격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 필요가 있다. 달리 표현하면, 그의 실존의 불안전성에 대한 인간의 의식, 불안과 “비존재에 대한 실존적 의식”과 실존은 의미가 없으며 부조리일지도 모른다는 고뇌에 시달린다. 틸리히는 심리학에, 실존주의에, 예술과 시에, 역사와 정치적 사실들 속에 나타난 현대의 문화적 표현의 다양한 형식들을 읽으면서 이 불안이 현대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인간상황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게 이끌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많은 증거를 발견한다. 이 무의미성에 대한 현대인의 반응은 절망, 무감각, 자기 파괴적인 경향, 삶에는 가치있는 것이 없다는 일반적 느낌으로 나타났다. 삶은 무의미하지는 않더라도 제한되어 있다는 깨달음으로도 문제는 동일하게 제기된다. 인간은 어디서 존재의 용기를 찾는가, 인간의 삶의 의미에 대한 자신의 불안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인간은 그의 자유를 통하여 그의 존재의 용기를 표현하는 길을 선택한다고 틸리히는 주장한다. 인간은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선택을 할 자유를 사용함으로써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길을 택한다. 그것은 자아와 삶의 의미의 유일한 원천으로 내재하는 자유로써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결단 속에는 본질적인 인간의 유한성의 조건에 대한 거부가 내재한다. 인간은 의미를 발견하기보다 의미를 부여하기로 결정한다. 달리 표현하면, 삶 속의 의미의 유일한 원천으로서의 자아의 선택은 곧 인간의 현실조건을, 인간의 유한성과 의존성과 제한성을 거부하는 쪽으로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이리하여 인간은 그에게 존재의 용기를 가져다 줄 것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현실 조건을 부인하고 자신을 현실상황으로부터 분리시키게 된다. 즉 소외의 상태를 선택한 것이다. 틸리히에게는 이 소외의 상태가 곧 죄의 상태이다. 이 선택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자신의 신으로 만들고 동시에 자신의 정체, 곧 자신이 유한하고 제한된 존재임을 부인하게 된다.


이와 같은 자유롭게 선택된 상태의 결과는 자신의 참다운 존재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느낌과 그것에 따른 고독감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틸리히는 이 시대 사람들의 병, 이들의 절망감, 공허감, 냉소주의,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큰 원인이 존재의 용기를 찾음에 있어 이같이 자유를 근본적으로 잘못 사용한 데 있다고 본다.


인간 존재의 근거로부터 원초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이와 같은 상태로부터 인간은 스스로를 탈출시킬 수가 없다. 인간이 이런 방향으로 기울이는 모든 노력은 그가 선택한 소외의 조건 속에 뿌리가 있으며, 그로 인하여 실패할 운명에 처해 있다. 이리하여 개선을 위한 인간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모든 노력, 인간의 개인적인 도덕적 성장의 노력, 심지어 인간의 종교행위까지도 그것이 그의 소외된 자아로부터 온 것인 한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것이 인간의 상황에 대한 틸리히의 분석 내용이다. 이 시대의 온갖 문화적 표현들을 읽으면서 틸리히는 그런 문화적 표현들 역시 본래적 존재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이면에 언제나 그의 근본적인 물음이 되어 왔던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본다. 나는 누구이며, 나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대목에서 틸리히는 비로소 인간의 물음으로부터 신의 대답으로 시선을 돌린다.


신의 대답


대답의 시작은 인간이 자신의 현실적인 모습을, 곧 자신이 유한하고 따라서 의존적인 존재임을 알게 되는 데 있다. 이런 사실의 시인은 다시 인간이 의존하여 있는 분, 그가 그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킨 분을 시인하는 데로 이끈다. 그 분은 다른 존재자들 가운데 한 존재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존재의 근거요, 존재 그 자체요, 궁극적인 실재이다. 이리하여 틸리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모든 존재의 이 무한하고 다함없는 깊이와 근거의 이름이 하나님이다. 이 깊이가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이다.”


틸리히는 하나님을 존재의 근거로 시인하는 일이 모든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궁극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고 실제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궁극적인 관심은 동의어이다. 틸리히가 말하는 궁극적인 관심의 보다 명확한 뜻은 복음서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에 대한 틸리히의 설교 가운데서 나타난다. 그 두 자매는 한 인간이 삶의 의미에 대해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가능한 견해를 말해주는 상징으로 사용된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경우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상황에 대한 틸리히의 분석에서는 모든 사람은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어떤 대상을 갖는다. 이 일은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고, 이 일을 위하여 이들은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 놓으려 한다. 궁극적인 관심은 보편적인 인간의 현상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신앙인이다. 까닭은 하나님이란 이름은 한 인간에게 궁극적인 관심사가 되는 것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존재의 근거와 궁극적인 관심으로 이야기하는 데서 틸리히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그러나 연결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첫째, 하나님은 삶의 깊이의 차원으로 이해된다. 인간은 모든 것이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현실의 표면 아래로부터 자신의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일들의 차원으로 뛰어들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인간이 현실의 핵심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관심사로 보다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이 지점에 도달하는 때 인간은 모든 현실(실재)에 존재와 최종적 의미를 주는 것에 도달한다. 곧 인간은 존재의 근거에 이르고, 하나님을 만난다.


이제 틸리히는 그의 다음의 논점으로 옮아간다. 그는 기독교 메시지에서 이 하나님은 분리와 소외와 절망의 실존적 상황에 처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그의 삶에서 그에게 의미와 희망을 주는 것을 애타게 찾는다. 이 인간에게 하나님은 그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야기하신다. 즉 인간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의 약속을 제공하신다.


새로운 존재


신약성서에 묘사된 예수의 인격에서 인간은 존재의 근거로부터 분리된 상태에 빠지지 않은 한 인간을 본다.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인간 상황의 모든 여건 하에서 살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 역시 그의 자유를 행사하였다. 언제나 그가 처한 명확한 맥락 안에서, 곧 의존적이고 유한하고, 따라서 제약된 존재의 맥락 안에서 그의 자유를 행사하였다. 이와 같은 존재로서 그는 그의 존재의 근거를 철저히 인정하면서 살았다. 그에게는 틸리히가 말하는 완전한 “신-인성”이 있었다. 이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간 곧 존재 자체의 깊이까지 들여다 보는 인간이다. 그는 완전한 인간이었으면서도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고 하나님과 계속 연합하면서 살았다. 그는 궁극적 실재와의 모든 분리를 완전히 극복한 인간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여 그는 그의 모습대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살았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인간의 새로워지는 힘이, 인간이 자신과 하나님과 화해하는 힘이 있다. 여기에 새로운 존재가, 인간 구원의 원리가 있다. “… 소외된 것을 재결합시키고, 갈라진 것에 중심을 주고,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그의 세계, 인간과 그 자신 사이의 균열을 극복함이 있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인간은 이 새로운 존재의 힘을 나누어 갖게 된다. 이 힘으로 인간은 자유를 오용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인간은 그의 인간적 실존을 따라다니는 분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인간은 신-인성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이 새로운 존재에 참여하게 되는가? 기독교는 이상스럽게도 역설적으로 인간은 그가 용납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새로운 존재를 허락하심을 믿고 신뢰하기만 하면 된다. 토마스(J. Heywood Thomas)는 틸리히의 신앙 관념을 다음과 같이 해설해 주고 있다. 


인간이 이와 같은 믿음과 신뢰에 이르게 되면, 그는 현실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 곧 죄인이나 구원을 받은 자이며, 분리되었으나 신적인 근거와 결합(연합)된 존재인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 용납함을 받음으로부터 인간은 자기 자신을 용납하게 된다. 이리하여 인간은 치유함을 받는다. 그리고 그 새로운 존재의 힘에서 인간의 물음 곧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신의 대답이 주어진다.